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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당선자는 '서민'을 말할 자격이 있는가?
서민적인 정치인이라면 서민을 먼저 위하는 정치를 해야
 
정문순   기사입력  2003/02/11 [15:34]
오늘날 한국어에서 ‘-적(的)’이라는 접미사는 매우 왕성하게 쓰이고 있는 낱말이다. 그러나 이 일본식 한자어가 우리말을 망친다며 질색을 하는 한글운동가들도 있는데, 그것에서 파생된 낱말의 의미가 똑똑치 못하다는 이유 때문이다. 가령 ‘서민적인’ 사람은 ‘서민’인가, 아닌가. 아니라면 ‘서민’과 어떻게 구별되는가.

사전에는 ‘-적(的)’이 붙은 낱말은 그것이 붙지 않은 낱말과 비슷한 성질을 가지거나 일정한 관계를 만든다고 설명하고 있다. 비슷하다는 것은 그 낱말이 품고 있는 의미의 범위가 넓어질 수 있음을 말한다. 의미 영역이 넓게 걸쳐진다는 것은 곧 애매모호한 정보의 산출을 낳을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말의 오용 가능성이 염려되는 것이 이 부분이다.

서민과 서민'적'의 사이

서민 흉내내기나 위장에 불과한 것이 ‘서민적’이라는 말에 슬쩍 합류해 들어올 가능성을 생각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처럼 제대로 정치의식화 되지 못한 사람들이 많거나 정치적 자유가 오랫동안 보장되지 못한 나라에서는 말의 비틀어지고 일그러짐이 가능성으로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한국 정치에서 서민 흉내내기의 할아비 격을 들라면 아마 박정희일 것이다. 독재자에게서 서민과 터럭만큼이라도 끈이 닿는 부분을 찾으라면 빈농 출신이라는 것과, 막걸리 입에 댈 줄 안다는 것 정도였다.

그가 자신의 내력을 강조하고, 논두렁에서 농부들과 막걸리 마시는 모습을 연출한 것은, 절대 다수가 농촌 출신이던 당시 국민들 뇌리에 자신을 서민적인 인물로 각인시키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굶주리던 시절을 못 잊어 청와대 마당에 돌나물을 키웠다는 말도 전해진다. 그러나 불행히도 많은 경상도 서민들은 그 원숭이 짓 뒤의 실체에 눈감으며, 독재자를 서민과 겹쳐보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서민 흉내내기를 ‘서민적’인 것으로 호도하는 어리석은 정치인이 박정희에서 끝난 것은 아니다. 가까이는 귀족의 때깔을 감추기 위해 ‘서민투어’를 감행한 대선 후보가 있었다.

이에 비하면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어떤가? 사실 그만큼 ‘서민적’이라는 말과 어울린다고 평가받는 정치인은 찾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이미지 메이킹의 측면이 작용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서민적이라는 그의 이미지는 우선 그의 출신 배경과 풍모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를 ‘시정잡배라고 매도한 기득권 정치인들의 의도적인 이미지 왜곡과, 그것과 정반대 되는 그의 지지자들의 노력에 힘입은 바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사실 그가 순전한 서민으로 산 것은 사법고시 합격 이전일 뿐이며, 그 이후 법조인과 재야 인사, 그리고 정치인으로 살아온 반생 역시 서민적인 것이라고 말하기는 부족하다. 사람들은 보수 정치권의 인물이 서민적으로 살거나 그만한 의식 구조를 가지는 것이 가능한지에 대해 쉽게 잊고 듯하다. 물론 서민에게 종종 우호적인 태도를 비치는 노 당선자의 태도는, 약자에게 철저히 무심하며 딴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한 기득권자들과는 현저히 다른 것일 수 있다.

노동하기 좋은 나라는 왜 안되나

그러나 대통령 당선자에 대한 판단은 개인의 성정이 아니라 그의 정치 의식과 정책으로써 할 일이다. 서민적인 정치인이라면 당연히 서민을 먼저 위하는 정치를 해야 한다. 대선 기간 중에 그리고 집권 준비를 하는 지금 과연 그가 그런 모습을 보여왔는가? 비정규직이 너무 많다던 그의 발언은 당선 기자회견에서 대기업 노동 환경이 노동자의 해고나 비정규직으로의 전환을 어렵게 한다는 비판으로 바뀌었다. 기업주가 잘 살아야 저절로 노동자에게 이익이 된다는, 국가경쟁력을 노동 착취를 통해 해결하겠다는, 끝내 절망에 이른 노동자의 분신을 불러온 현 정권의 경제 정책이 차기 정부에서 수정되리라고 기대하기는 힘들어 보인다.

[관련기사] 이장춘, 노무현, 노동자들의 적이 되려나?, 대자보 95호

근래 들어 ‘기업하기 좋은 나라’ 만들겠다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그가 왜 ‘노동하기 좋은 나라’ 만드는 데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는가? 부풀리기도 헐뜯기도 금물이다. 그의 정체성과 어울리지 않는 지나친 평가나 기득권 층과 영남의 부당한 트집 잡기를 막기 위해서라도, 보수적인 틀 안에서의 온건개혁론자라는 실상이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 편집위원

* 필자는 문학평론가입니다.
* 본문은 '언론개혁을 바라는 시민들이 힘을 모아 만든 신문' 경남도민일보 http://www.dominilbo.co.kr/ 2월 10일자에 실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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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02/11 [15:3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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