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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낡은 정치' 청산이다
인터뷰·새천년민주당 의원 천정배
 
박민영   기사입력  2003/02/03 [16:42]
김대중 대통령은 초선의원 천정배를 가리켜 "수석과 일등만 해온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만큼 겸손한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임수경은 천정배 의원의 에세이집 『꽁지머리를 묶은 인권변호사』를 읽고 나서, "나는 그의 여성관이 퍽이나 마음에 들었다. 여성 해방을 입으로만 외치는 남자보다는 대안이 있는 페미니스트가 더 매력적인 것은 당연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천정배라는 이름이 최근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의 핵심 참모를 소개하는 언론 기사에서 빠지지 않고 있다. 광주경선에서 노무현이 승리할 당시 유일하게 그를 지지했던 현역의원 천정배를 1월 3일 저녁 여의도 맨하튼 호텔에서 만나보았다.

지난 대선 이야기부터 좀 해보기로 하지요. '새로운 세대로 신주류가 형성되었다'든지 '인터넷의 영향력이 조중동을 물리쳤다'는 등의 평가가 언론에서 많이 나왔는데, 천 의원님은 지난 선거의 의미를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다 맞는 말이지요. 저는 이른바 노풍이 불던 당시에도 '이것은 혁명이다'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 정치인들이 모르는 사이에, 한국 사회에 요즘 언론에서 말하는 극히 건전하고 상식적인 신주류가 형성되어 있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이번 선거 과정에서 저희 후보 캠프에선 정치개혁추진위원회라는 걸 만들었습니다. 노 당선자의 전적인 의지가 담긴 결과였는데, 3N이라고 해서 새로운 시대(New Stage), 새로운 주류(New Stream), 새로운 정치(New Politics)를 추구하고자 했지요.

실제로 선거운동 방식이 5년 전 DJ 때와 비교하더라도 상당한 차이가 있었는데, 이른바 돈이나 세몰이에 의존하지 않는 국민참여 방식의 선거를 하는데는 국민에 대한 신뢰랄까 그런 게 밑바탕에 있어야 할 텐데요. 한편으로는 노 당선자의 의지를 쫓아가면서도 일종의 불안감이랄까 그런 건 참모들 사이에 없었나요?(웃음)

솔직히 말하자면, 가장 깨끗한 정치가 성공할 수 있다는 온전한 확신을 갖고 있진 못했습니다. 결과가 이미 나온 후에 노 당선자에게 아부하는 것 같아서 겸연쩍습니다만(웃음), 진실로 이번 선거운동 방식은 노무현 당선자의 확고한 철학과 의지가 아니라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우리 나라의 정치 현실은 조직을 동원하고 대규모 자금을 조달하는 일종의 전쟁과도 같습니다. 선거에 이기기 위해서 나중에 감옥갈 수 있는 일도 마다하지 않던 게 기존의 승리지상주의였습니다. 그런 관성에서 저희 참모들 역시 온전히 자유롭지 못했던 게 사실입니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주변 참모들은, 저도 사실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만, 자금도 계획을 세워서 모아야 하고 조직적으로도 이런저런 여러 인물들을 포용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건의를 '무원칙'하게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느 누구 예외 없이 참모들이 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노 당선자는 자금 모금 하나만 보더라도 '내가 선거에 지는 한이 있더라도 원칙을 무너뜨릴 수 없다'는 신념이 확고한 분이었습니다. 기성 정치인의 관점에서 보면 완전한 몽상가였지요. 그래서, 후보를 흔들거나 탈당해서 한나라당에 가는 사람들까지 나왔던 겁니다. 그들의 눈엔 대책없는 몽상가처럼 보였으니까…….

당내 경선 당시 광주에서의 승리로 분위기가 노 후보에게 기울기까지 소위 개혁파 의원들 중에서도 노 후보를 지지한 현역의원은 천 의원님이 유일하셨지요. 혹시 인권변호사 시절의 친분 때문에 팔이 안으로 굽었던 건 아닙니까?(웃음)

(정색을 하며) 제가 노 당선자와의 개인적인 인연 때문에 그분을 지지했던 건 전혀 아닙니다. 그런 사적 인연으로 들자면 김근태 의원과도 그에 못지 않습니다. 한화갑 대표와도 학교 선후배로서의 인간적인 미안함이 있었고, 바른정치모임을 함께 한 정동영 의원과도 그랬습니다. 노 당선자를 지지한 건 그분이 지도자로서 탁월한 자질과 신념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며, 저로선 그다지 망설이거나 고민할 여지도 없었습니다.

광주에서 승리한 게 이인제 대세론에서 노풍으로 흐름이 바뀐 역사적인 기점이 된 것 같은데, 그때 천 의원님이 눈물을 흘리시는 장면이 TV 화면에 잡히더군요.

언론에서는 3위를 예상했지만, 저희는 내부적으로 광주에서 이길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저희가 대의원들을 대상으로 전화를 하고 대화를 나누는 과정에서도 민심이 느껴졌고요. 그리고, 일반의 통념과는 달리 노 후보 진영이야말로 조직이 가장 강했습니다. 왜냐하면, 지구당 위원장이나 당료들은 저희 진영에 거의 없었지만, 어떤 후보도 갖지 못한 수많은 '자발적 지지자들'이 자원해서 뛰고 있었기 때문이죠. 지나고 나니 하는 이야깁니다만, 어떤 지구당에선 위원장이 타 후보를 찍도록 독려하는데도 지구당 사람들 거의가 저희를 지지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 기간을 돌이켜보면, 제가 앞으로 정치를 계속하며 저 자신의 선거도 더 치르고 하겠지만, 제 일생에 그때처럼 신이 나서 선거운동을 또다시 할 수 있을까 싶습니다. 3월 16일까지의 그 기간은 정말 특별하고 감동적인 체험이었지요. 하지만, 승리를 믿고 있었는데도 막상 개표 결과가 발표되자 감격이 북받쳐 오르더군요.

김근태 의원이 대선 기간 중 노 당선자에게 보인 소극적인 태도를 두고 해석이 분분했습니다. 한 시사주간지에서는 노 후보가 김근태 의원을 감정적으로 섭섭하게 만든 것이 라이벌 의식을 더욱 자극했다고 추측하기도 했는데요. 김근태 의원의 행보에 대해 어떻게 느끼셨나요?

글쎄요, 제가 다른 정치인에 대해 평가하거나 언급하는 건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요. 국민들이 느끼고 판단하셔야지……. 그냥 제 이야기로 대신할게요. 제가 지지 의사를 처음 밝힌 건 재작년 7월 부산에서였습니다. 개혁파 후보들 중 노 후보에 대한 배타적 지지는 아니라고 했습니다만, 그건 다른 분들에게 미안해서 그렇게 말한 것이고, 사실 제 마음속으론 이미 배타적 지지였지요.(함께 웃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하나는 이 나라의 잘못된 정치구도에 맞서 도전한 거의 유일한 정치인이면서 일부 언론의 폄하와 왜곡에도 불구하고 능력이나 자질에서도 출중한 분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저는 그분이 1988년 5공 청문회 스타가 된 게 결코 우연이 아니라 당연한 결과라고 보았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그분이 한나라당 후보에 맞서 이길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카드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제 나름대로는 영남 쪽에 사는 지인들에게 득표 가능성에 대해 상의하기도 했고, 아무튼 저도 제 정치생명이 어느 정도 관련될 수밖에 없는 만큼(함께 웃음) 합리적인 검증을 많이 해보았지요. 현역의원들은 거기에 동의하는 이가 없었지만, 오히려 일반 국민들은 민주당 후보가 되어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노무현이라는 걸 당연시하는 것 같았습니다.

정몽준 후보와의 단일화 압력이 거세어질 때 옆에서 지켜본 노 후보의 심경은 어떠했나요?

노 당선자가 선거 과정에서 감정을 잘 드러내는 편이 아니셨어요. 본인 속마음이야 오죽하셨겠습니까만 댁에 가서 가족들 앞에서 허심탄회하게 감정을 내비치는지 몰라도, 바깥에선 의연한 모습을 보이셨어요. 따라서 저도 그분 심경을 대변해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개혁국민정당 발기인 대회에서 문성근 씨가 연설 도중 민주당의 문제를 거론하자 노 당선자가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까? 부산에서 민주화운동을 함께 하던 옛 동지들 앞에서도 눈물을 흘리셨고……. 아마도 속이 새카맣게 타들어 갈 정도였으리라 미루어 짐작은 됩니다.

하지만, 그분의 도덕적 자긍심과 신념이 강했기 때문에 그런 과정들을 이겨낼 수 있었으리라 여겨집니다. 단일화에 성공했지만 선거공조가 잘 진행되지 않을 때 "실패한 대통령이 되느니 실패한 후보가 되겠다"고 하신 데서 볼 수 있듯, 그분은 대권욕에 눈이 먼 분이 아니셨습니다. 또한, 투표일 며칠 전엔 이런 말씀도 하셨어요. "제가 실패한다면 효과가 반감되겠지만 성공하면 정치 모델로 뿌리를 내릴 수 있거든요. 이미 그 동안에 바뀐 것만 뿌리를 내려도 엄청난 정치발전 아닌가요?"

노 당선자의 대선 슬로건이 '낡은 정치를 바꾸자'는 것이었는데, 우리 정치가 큰 흐름에서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 개혁특위 간사로서 목표를 말씀해 주시죠.

첫째, 무엇보다도 지역주의가 청산되어야 합니다. 노무현 당선자가 밝힌 중대선거구제로의 전환도 이런 맥락에서 추진되는 것입니다. 둘째, 권력정치의 청산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제왕적 대통령이나 총재의 의사에 따라 정당이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의사가 직접 의사결정에 반영될 수 있는 정당개혁이 필요합니다. 셋째, 제도와 인적 쇄신의 동시 달성이 필요합니다. 인적 쇄신은 낡은 정치에 익숙한 사람에게서 민주적 마인드를 가진 이들로 지도부와 더불어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주류세력이 교체되는 것을 뜻합니다. 인적 쇄신은 당장의 강제적인 인적 청산을 뜻하는 것이 아니며, 인적 청산은 2004년 총선에서 국민의 심판으로 되어야 할 것입니다.

한화갑 대표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쇄신파 의원들의 주장을 '개혁을 빙자한 권력투쟁'에 불과하다고 비난했습니다. 실제로 일부 '친노파' 의원들이 당직을 일부 확보하는 수준에서 민주당 개혁이 유야무야되지는 않을까요?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질책은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수위를 넘어섰고, 이번 대선 결과가 그걸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정치와 정당개혁은 거스를 수 없는 역사적인 흐름이며, 국민을 바라보고 나아간다면 개혁세력이 승리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개혁국민정당 유시민 대표는 구시대 정치 요소들과 인물을 안고 있는 민주당의 틀 내에서 진정한 개혁은 불가능하니 개혁세력이 개혁당으로 모이라는 제안을 내놓은 바 있습니다. '고래를 삼키는 새우'라는 슬로건을 내건 개혁당을 민주당 개혁파 의원들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새로운 의사결정구조와 민주적 제도 운영에 있어선 개혁국민정당과 민주노동당이 정치문화 개혁을 선도하고 있는 한국 정치의 소중한 자산인 게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특히, 개혁당은 저희와 이념, 가치관에서 공통분모를 많이 갖고 있으며 서로 상승 효과를 내면서 한국 정치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는 데 견제와 협력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로 뭉쳐서 새로운 정치를 해나갈 세력으로 국민 앞에 서길 기대합니다. 민주당이 과연 탈바꿈할 수 있겠느냐는 개혁당의 시각에 대해선 저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습니다. 민주당은 한국 민주화운동 세력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정당이며, 국민참여경선이나 지난번 대선 과정에서 보여주었듯이 여타 정당이 갖지 못한 성과도 이루어낸 게 사실입니다. 저는 민주당의 개혁 가능성을 보다 낙관적으로 봅니다.

이미 선거운동 기간에 진보정당 쪽에서 많이 나온 논리입니다만, 노 당선자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지금보다 대미관계, 노동, 인권, 복지 문제 등에 있어 오른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지난번 '촛불 시위 자제 요청'을 두고도 그런 말들이 나왔는데요.

김영삼 정권은 군사기득권 세력과의 연합을 통해서, 김대중 정권은 지역주의에 기반한 보수세력과의 연대를 통해서 탄생한 정권입니다. 두 정권의 보수회귀 또는 개혁의지 쇠퇴는 집권세력의 그런 구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습니다. 반면, 노무현 정권은 그런 환경에서 자유로우며 '국민에게만 빚을 진' 정권입니다. 또한, 노 당선자는 한 인간으로서의 명분 있는 삶에 대한 의지가 너무나 강한 사람입니다. 그는 단순히 시간의 흐름에 따라 초심이 바뀔 사람이 아니며, 어쩔 수 없는 환경의 변화가 있더라도 국민의 의사를 묻는 작업부터 먼저 한 뒤 자신의 공약이나 정책을 바꿀 분입니다.

노 당선자의 언론개혁에 있어선 법과 원칙에 따라 나아간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겠지요?

'모든 부당한 프리미엄을 혁파'한 정의로운 사회를 만든다는 게 노 당선자의 신념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언론도 낡은 시대의 관행과 불법을 고수하고자 한다면, 개혁의 흐름에서 비켜갈 수 없겠지요. "정치는 정치의 정도를 갈 테니 언론은 언론의 정도를 가라"는 말에 노 당선자의 입장이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이수성 전 총리가 천 의원님 후원회장을 맡고 계신데, 과거에 그분이 직접 정치를 하실 때의 이력이나 노선이 천 의원님과는 좀 차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웃음) 어떤 계기로 그분이 후원회장을 맡게 되셨나요?

후원회장은 말 그대로 후원회장이니까 정치적인 입장이 꼭 똑같아야 하는 건 아닌데…….(웃음) 이수성 전 총리는 제 대학교 은사님이신데, 저뿐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을 아끼고 소중히 여겨주시는 분입니다. 개인적으로 참 존경하는 분이고……. '후원회장을 좀 맡아주십시오'라고 말씀드리니 제가 문장을 채 마치기도 전에 '그래'라고 대답하시더군요. 저와 정치적인 입장이 달랐던 적도 있습니다만, 끝까지 제 후원회장을 맡겠다고 약속하고 계시고 저도 그렇게 되길 희망하고 있습니다.

사법고시 합격 후 인권변호사 생활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서울법대 출신의 엘리트 변호사로서…….

저는 대학 다닐 때 저 자신은 반독재운동에 앞장설 만큼 용감하지는 못했지만, 운동권 친구들은 숭배에 가까울 정도로 좋아하고 지지했습니다. 여하튼, 1978년에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군법무관으로 복무하던 시기에 12·12 쿠데타 등이 있었습니다. 제대 후 법관·검사 임용을 하는데, 도저히 전두환 정권하에서 판사나 검사로 일하지 못하겠더군요. 저로선 판검사직을 거부하고 변호사로 시작하는 것도 쉽진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부모님을 비롯해 주변에서 만류가 심했거든요.

1985년에 조영래 변호사 등과 변호사 업무를 함께 하면서, 저는 그 훌륭한 선배를 제 사표로 삼고 싶을 정도로 조 변호사를 존경했습니다. 인권변호사로서의 활약은 그분이 하셨고, 저는 단순히 살림을 맡아 하는 정도로 보조하고 있었지요. 그러다 1987년 구로구청 부정선거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일손이 부족하다보니 제가 김희선 의원, 고 김병곤 씨 등 동대문경찰서에 수감된 분들을 접견하게 되었습니다. 인권변호사로서 첫발을 내딛은 셈이지요. 부족함이 많았습니다만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여 구로 사건 지도부를 변론했습니다. 그게 계기라면 계기가 되었고, 민변 창립에도 관여하게 되었지요.

1993년에 안산에서 노무현 당선자와 함께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다 정치에 입문하셨지요? 15대 총선에 참여할 결심은 어떻게 하게 되셨습니까?

전남 신안군 암태도가 제 고향입니다. 거기서 태어나서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목포에서 중고등학교를 나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김대중 대통령 주변의 핵심인사들을 알게 되었지요. 사실은 1988년 13대 때 이미 평민당 진영에 있던 모 선배가 저에게 출마하라고 권유를 했지요. 그런데, 저는 대학 다닐 때 운동권에 직접 끼어들여 함께 하지 못했듯이, 정치에 참여한다는 건 저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졌고 변호사 업무에 자긍심이 컸습니다. 그래서, 당선이 보장된 지역이었지만 출마를 사양했지요.

그런데, 이른바 인권변호사 활동을 하다 보니까 인권 부문에 있어서의 비약적인 신장이 정치가 달라지지 않고선 불가능하다는 걸 점차 깨닫게 되었습니다. 특히, 문민정부 아래서 양심수 변론에 눈코 뜰새없이 뛰어다니며 YS에 대한 실망과 배신감이 너무나 컸습니다. 1993년도에 노동자와 서민이 많은 안산 지역에 노무현 당선자와 사무실을 개업하니 지역정가에서 저희를 예의주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차에 1995년 15대 총선 기간이 되니 신문에 자꾸 제 이름이 안산 지역 공천 예정자로 오르내리더군요. 나중에 국민회의 쪽에서 공천 제의가 왔고, 며칠 밤낮을 고뇌한 끝에 정권교체를 위해서 정치에 참여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정치에 발을 들여놓고 난 지난 7년간을 회고하신다면 어떻습니까? 지금 민주당 내 '강경개혁파'의 대명사로 언론에서 거론되는데 처음부터 그런 소신을 일관되게 갖고 계셨습니다.

어느새 재선의원도 되었고 7년 정도 정치 활동을 해왔는데, 돌이켜보면 그 동안 경험 부족으로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습니다. 선배 정치인들에 대한 무비판적인 신뢰가 낳은 시행착오라고도 할 수 있는데요. 그러한 점에서 아쉬운 대목이 많습니다. 앞으로는 우리 정치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게 저의 주된 목표이자 욕심이기도 합니다.

제가 처음 정치권에 들어와 사람들을 만나보니, 우리 당내에도 인간적으로 참 좋은 분들이 많더군요. 그래서 제가 정치에 입문하기 전에 갖고 있던 정치에 대한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재야동료들에게 정치에 대해 방어하고 변호해 주는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점차 지나면서 보니까, 정치권에 나름대로 괜찮고 생각 있는 정치인들이 있다는 것과 정치권이 구조적으로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은 서로 모순되는 게 아니더군요.

즉, 개개인의 정치인들 중엔 선의를 가진 이가 많을 수 있지만, 구조화된 제도와 관행 때문에 정치가 국민에게 욕을 먹을 수밖에 없는 모습에 식별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제가 노무현이란 기성 정치인과 전혀 다른 인물에게 더욱 주목하게 된 이유이고요. 저도 처음엔 현실정치에 빨리 적응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가 어느 순간부터 그 현실과 부딪치고 바꾸어내야겠다는 결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16대 총선 기간에 저희 지역 시민들에게 제가 항상 하던 주장이 "죽을 힘을 다해 정치를 바꾸겠습니다"는 약속이었지요.

법사위원회와 제도개선특위 등에서 주로 활약해 오셨는데, 보람을 느끼는 법안이나 활동에는 어떤 것이 있었습니까? 반대로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후회하시는 선택을 하나만 꼽는다면요.

개혁입법을 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한 게 의정 활동에서 보람 있었지요. 돈세탁방지 관련법이나 부패방지법, 국가인권위원회법, 상가임대차보호법 같은 것들. 후회가 되는 일은 너무나 많지요. 초선 때는 제가 너무 조심스럽고 얌전했습니다. 정치적 소신을 구현하는 대목에서 스스로가 강하지 못했습니다. 정치 선배나 지도자에 대한 존경심과 신뢰가 제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게 막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했고……. 특히, 제게 오점으로 남아 있는 건 역시, 입에 담기도 싫습니다.

천 의원님을 가리켜 정치부 기자들은 '당선자에게서 가장 신뢰받는 정치인', '노심은 천심'이라는 표현까지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자들과 인터뷰를 하면서 천 의원님이 동료 정치인이나 다른 정당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하는 걸 주저하거나 어려워하시는 걸 여러 번 보았거든요.(웃음) 개인의 성품 측면에서 본다면 이는 분명 미덕입니다만, 앞으로 노무현 당선자가 잘못된 판단을 할 때 직언을 하기에는 너무 온화하고 조심스런 성품이 아니신가 우려가 됩니다.(웃음)

비판할 때와 장소에서는 매섭게 비판합니다. 오늘처럼 제 신상 문제나 개인적인 성향을 다루는 회견에서 다른 정치인을 비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노심은 천심이다'는 식의 언급들에는 분명 과장된 면이 있습니다. 다른 분들이 생각하듯이, 제가 유독 당선자와 가깝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제가 그분을 의원들 중 가장 먼저 지지했다는 사실 때문에 언론에서 추론하는 면이 있습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을 만드는 데 쏟아진 국민의 기대와 염원이 단순히 노무현 개인이 아닌 그분이 대표하는 가치와 신념에 근거한 것임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국민의 희망과 바람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어긋난다고 생각되면 저는 언제든지 직언할 것이고, 그 점에 있어서 자신이 있습니다. 직언할 수 있는 통로가 차단된다면 모를까, 제가 할 수 있는 한 언제나 고언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천정배 의원 약력>
1954년 전남 신안 출생. 서울대 법대 졸업. 18회 사법고시 합격.
민주화를 위한 변호사 모임 상임간사 역임.
해마루법률사무소 대표, 15·16대 국회의원.
정책위부의장, 원내 수석부총무 역임.
노무현 대통령 후보 정치특보 역임, 정치개혁특위 간사.

* 본문은 월간 [인물과 사상] (http://inmul.co.kr) 2월호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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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3/02/03 [16:42]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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