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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태와 진중권: 장인정신과 멧돼지정신의 충돌
별이 떨어지다--한국 문화계(文化界)의 위대한 장인(匠人)을 추모하며
 
무위   기사입력  2006/04/08 [22:53]
.. 첫 단락은 故 이규태님을 위하여 비웁니다! ..
 
이규태를 인종차별주의자로 몰고 간 진중권의 저돌성(猪突性)
 
필자가 진중권의 글을 처음 접한 건 9.11 테러에 관한 사회적 이슈가 한창이었을 때 였을 것이다. 그때 그가 쓴 글에서 예로 든 카오스 이론을 보았다. 첫 느낌은 논리적 비약이 너무나 심해서 정말 저 사람이 카오스 이론은 제대로 알고 썼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이건 엘런 소칼이 프랑스 지성계에 만연한 지적 사기 풍토에 의문을 품은 것과 같은 동기였다. 한데 정말 공교롭게도 앨런 소칼이 쓴 <지적 사기>라는 책에도 '7. 간주곡-카오스 이론과 포스턴모던 과학' 이란 소제목을 단 글이 나온다. 진중권의 그 글을 처음 접했을 땐 "참 재미있는 사람도 다 있구나" 라고 했을 정도였다.
 
급기야 그는 조선일보 칼럼니스트 이규태가 말한 아랍의 소위 인샬라 문화를 논하는 글에서 '살람 말레꿈' 이란 아랍의 인사말을 이용하면서, 일생을 비교문화 연구에 바친 故 이규태씨를 단어 몇 마디를 꼬투리 삼아 마치 인종차별주의자로 몰고 갔다. 문화의 상대성을 밝히기 위해 비교 문화연구에 평생을 바친 사람에게 인종주의 망언(妄言)만큼 모욕적인 언사가 있을까? 나는 그 이상의 모독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 폭력을 선동할 때의 진중권을 보고 영락없이 씩씩거리는 멧돼지가 돌진하는 모습을 연상한 사람은 단지 필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맨손으로 식사하는 문화
 
나는 중동 바이어와 오랫동안 무역을 해온 관계로 인도 아라비안 문화를 상당히 접해 왔다. 게다가 필자가 대학 시절에 문화 인류학에 심취했었기 때문에 우리와 상이한 문화를 해석할 수 있는 역량이 나름대로 갖추어진 상태였다.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mosque)에도 수 차례 가 보았고 심지어 중동 사람들과 식사를 할 땐 수저나 포커 대신에 손가락을 사용한다. 처음부터 카레라이스 같이 끈적거리는 음식을 맨손으로도 자연스럽게 먹는 모습에 오히려 무슬림들이 놀라워했다. 한번은 한참 맛있게 먹고 있는데 주변이 조용한 게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둘러보니 나의 이 모습을 흰옷에 수염이 텁수룩한 무슬림 식당의 사장이 캠코더로 찍고 있었다. 갑자기 이마에 땀이 흘렀다. 맨손으로 식사하는 것에 챙피하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남이 캠코더에 담고 있다고 생각하니 다소 긴장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수저나 포크로 식사하는 문화가 맨손으로 식사하는 문화보다 우등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화의 차이가 있을 뿐 등급은 없다고 생각한다.
 
독자들도 한번쯤 인도 아라비아계 식당에 가서 맨손으로 밥을 먹어 보기를 권한다. 새로운 문화를 체험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먼저 탄두리 치킨을 먹고 난 후 카레라이스나 케첩 같은 것을 발라놓은 쌀밥을 오른손 가운데 세 개의 손가락을 이욯하여 모으고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밀어 올리면서 입에 넣는다. 이때 마치 손에 미각이라도 있는 듯이 의외로 미묘한(delicate) 맛을 느끼게 될 것이다. 우리가 몰랐던 다른 문화에 대한 열린 마음과 문화의 상대성이란 이런 식으로 체험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의 아랍에 대한 상대주의적 태도는 나의 일방적인 태도일 뿐이며 그들도 우리 문화에 대해서 상대적인 태도를 갖지 있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타문화에 대해서 상대주의적인 태도를 갖기 힘든 이유는 이슬람이라는 종교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더 큰 원인은 그들의 식생활 문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타문화와의 융화를 가로막는 무슬림의 식생활 문화
 
바람의 딸로 유명한 오지 체험가 한비야가 겪은 일이다. 한번은 아프리카 오지로 들어갔는데 그 부족에서 그녀를 이상한 마녀쯤으로 보았는지 겨우 창으로 빛이 들어오는 골방에 가두고 사람들을 만나 보지도 못하게 해 버렸다. 말도 통하지 않지 배는 고프지 또 기운이 다 빠져서 "내가 여기에 왜 왔을까?"라는 회의에 빠져 있었다. 그렇게 3일 정도 되자 "이 한비야가 이제 여기서 죽는구나"하고 있는데 창문이 열렸다. 그녀가 가만히 밖을 보고 있는 앞에서 소의 목에 산 채로 구멍을 내서 그 흐르는 피를 염소 젖 같은 허연 액체가 담긴 컵에 받지 않은가? 보기만 해도 끔찍해서 치가 떨렸다. 하지만 내가 이 먼 아프리카 오지까지 와서 죽을 수는 없다. 저걸 안 먹으면 나를 저 어두컴컴한 골방에 평생 가두어 놓을 거야 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두 눈 꼭 깜고 그 끔찍한 주스를 받아 마셨다. 그랬더니 과연 나에게 광명이 비추었다. 그들은 나를 그들의 부족과 같이 친구처럼 대하기 시작했다 (중략)

한 문화권에서 다른 문화로 접하게 되는 음식 문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가르켜 주는 대목이다. 한비야는 외국에 가서 다른 문화를 체험할 때 언어는 안 통해도 좋지만 음식은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고 그녀가 쓴 저서에서 특별히 강조하고 있다.
 
 사실 서양 사람들이 한국의 김치나 된장국을 잘 먹으면 괜히 친근감이 생긴다. 고추를 먹고 매워서 온 몸을 비트는 광경에는 묘한 동정심마저 생긴다. 같은 민족이라도 손님이 우리 집에 와서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면 괜히 호감이 생기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아니 음식 그 자체가 그 민족의 복잡 미묘한 문화의 축소판일 경우가 많다. 그런데 무슬림은 아프리카에 간 한비야처럼 다른 문화의 음식을 받아 들여 호감을 사거나 다른 문화의 축소판인 음식을 경험할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한 채 살아간다. 이게 사실은 종교적 이유 때문인데 그들은 특히 육류의 경우에는 할랄(허용) 미트 즉 무슬림에 의한 이슬람식 도살법에 의해 죽인 고기만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게 다 동물을 죽일 때 고통을 줄여주기 위한 배려라고 한다. 그래서 한국의 비빔밥을 모르고 먹었다가도 미각으로 고기 한 점이라도  느끼게 되면 급하게 뱉어낸다. 이들이 한국에 들어오면 이태원의 이슬람 식당이 아니면 거의 채식만 해야 한다. 다른 음식을 먹어도 고기를 다 뺀 피자 정도만 먹는다. 홍콩 같은 곳을 가면 변두리 지역에서 일을 보다가도 이슬람 식당이 있는 퀸즈 로드(Queen's Road)같은 중심가로 가야 한다. 때로는 단지 이 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반나절을 투자해야 한다.
 
 무슬림들이 어느 나라에 가든 그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하고 모여 살아야 하는 이유에는 이 식사관습이 큰 몫을 차지한다. 무슬림들이 세계 도처의 음식을 특별히 가리지 않고 먹을 수 있도록 율법이 바뀐다면 다른 문화권과의 소위 문명의 충돌을 일으킬 가능성이 훨씬 줄어들 것으로 생각된다.
 
무슬림이란 신에게 바쳐진 자란 뜻이다. 이들이 보수적인 자세로 엄격하게 종교적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은 다음에 잘 나타난다. 선지자 무함맛(무하마드)이 말하기를, "우리의 것에다 새로운 것을 도입하는 자는 거부되어야 한다. (종교에) 새로이 도입된 것들을 주의하라. 새로운 것은 모두 틀린 것이고 잘못된 것이며 잘못된 것마다 지옥으로 가느니라." 그러므로 이슬람에 새로이 도입된 것이나 덧붙여진 것은 어떤 것이라도 비드아로 간주되며 거부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비드아란 권위 있고 원천적인 이슬람의 신앙이나 관례에 덧붙여진 것으로 이것은 새로이 도입된 신앙이나 관례를 뜻한다. 새로운 것이나 혁신은 절대적으로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종교적 계시는 여성의 참정권이나 새로운 제도의 도입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
 
평이했던 이규태 칼럼 '아랍인의 의식구조'
 
 누구보다 문화 상대주의적 자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또 무슬림 문화와의 접촉을 많이 했던 필자가 보기에도 이규태의 그 칼럼은 특별한 문제가 없어 보였다. 중동의 풍속과 기후와 토질적 요인과 문화에 기반하여 상당히 정교하게 짜여진 문화 비평이었다. 그리고 그때 이규태님이 지적한 아랍 사람들에게 대한 문화적 특질은 대부분 수긍하는 입장이다. 사업을 하다보면 서적이나 여행 같은 것으로는 도저히 얻지 못하는 더 깊은 영역까지 체험하게 된다. 사업은 이익이 걸려 있기에 인간의 여러 가지 특징이 표출된다. 그래서 그 사람의 성격을 알고 싶으면 일을 시켜 보라는 말이 생겨나지 않았는가 싶다. 때로는 학자들보다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훨씬 혁명적이다. 중국의 쑨원이 신해혁명을 이루고자 했던 근원이 그의 아버지가 외국인들이 많았던 상해에서 상업에 종사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본 적이 있다.
 
 KOTRA(대한무역진흥공사)에서 주는 정보도 있지만 여러 경험으로 난 중동 사람들과 거래를 할 때 그와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거래 대금이 완납될 때까지는 절대로 물건을 먼저 보내지 않는다. 남들이 왜 그렇게 편견이 심한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그들에게 되묻겠다. 거래대금을 떼이기라도 하면 당신이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냐고? 신용장에 구두점(.) 하나를 꼬투리 삼아서 계약을 지킬 수 없노라고 치시미 뚝 떼는 사람들이 아랍인들이라는 것은 무역하는 사람들이면 기본적으로 알고 있는 사항이다. 우리 회사의 중동 바이어들도 그렇지만 그들은 언제나 우리가 가족(Family)임을 입버릇처럼 말한다. 실수로라도 비즈니스 관계라는 말을 하면 펄쩍 뛴다. 정색을 하고 ‘아니 우리가 고작 그런 관계냐?’고 언제나 되묻는다. 또 신뢰가 중요하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산다. 그러나 계약을 쉽게 뒤집는 쪽은 십중 팔구 그들이다. 오로지 우리 회사하고만 거래할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하지만 아침에 호텔에 가보면 동종의 다른 사람도 그를 기다리고 있을 경우가 제법 있다.
 
 자기들끼리도 그렇게 서로 믿고 사는 것 같지는 않다. 바이어가 못 오고 그의 에이전트가 한국에 오는 경우에는 비싼 비행기 운임료에도 불구하고 꼭 두 명이 온다. 한 명은 나머지 한 명을 감시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크게 하는 일이 없다. 이런 관계로 그래서 이젠 그들과 쓴 계약서는 그냥 종이라고 생각하고 편하게 사는 방식을 익히게 되었다. 한번은 체코에 아랍 바이어를 데리고 갔다가 독일계 사업가를 만나서 계약서를 쓰고 온 일이 있다. 나중에 중동 바이어가 그 구매계약을 지키지 않았는데 한국 사람이라면 대충 넘어갔을 일이었다. 하지만 그 독일 사업가는 30만 달러 상당의 위약금을 에누리 한 푼 없이 받아 갔다. 이런 예에서 보다시피 많은 경우 그들이 하는 말과 실제가 다르게 나타날 수 있기 때문에 피상적인 친분으로는 잘 알기 힘든다는 뜻이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 특별히 악의는 없다.
 
올바른 문화 해석법의 예
 
진중권은 자기가 알았던 아랍인 친구는 살람 말레꿈을 말하는 평화 애호적인 사람이었고 이규태가 표현한 '복수에 민감하고 호전적' 사람은 한 명도 본 적이 없노라고 말한다. 그런데 우리 민족이 싫어하는 일본인이나 미국인들도 개인적인 친분으로 만나면 더할 나위 없이 예의 바르고 매너가 있는 사람들이다. 만나면 밝은 표정으로 먼저 아는 체를 할 만큼 인사성 밝고 싹싹하다. 그렇다고 그 민족이 예의바르고 매너가 있을 지는 몰라도 평화 애호의 민족이라는 것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부분으로 전체를 잘못 보는 오류로 매우 흔하게 빠지는 오류 중의 하나다.
 
진중권이 아랍문화에 대한 공부가 얼마나 되어 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중동 사람들이 살람 말레꿈이라는 인사를 하는 것은 맞다. 아랍인 친구에게 '살람 말레꿈'이란 인사를 하면 '말레꿈 살라'라고 대답한다. 이 과정에서 나는 그들을 껴안는다. 간혹 '아함둘라'라는 말도 종종 덧붙인다. 하지만 "살람 말레꿈-너희에게 평화를"이라고 인사를 한다고 해서 그들이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해석을 내리는 진중권은 '무식이 철철 넘쳐서 주체하기 힘든 사람'이라는 평을 들어서 마땅하다. 진중권의 더 큰 문제는 무식하면서 지독하게 부지런하다는 것이다. 무식하면 나서지 않고 가만있어 주는 것이 이 사회에 도움이 되는데 그런 수준으로 왜 자꾸 나서서 세상을 혼탁하게 만드는가?
 
알기 쉬운 예로 한국 사람들은 '안녕하세요?' 나 '저녁 잡수셨습니까?'라는 말로 인사를 한다. 이를 영어로 표현하면 Good Morning? Good Evening? 이 아니라 Are you still safe? 나 Did you have dinner? 다. 이건 표면에 나타나는 용어와는 정반대로 한국 사람들이 안녕하지 못한 역사를 살아 왔다는 것은 반증한다. 실제로 일제 징병기나 해방 후 서북 청년단이나 백골단 같은 극좌나 극우세력들의 횡포나 6·25 동란을 전후한 혼란기에는 '밤새 안녕하지 못한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우리가 드라마에서 흔히 보았듯이 한밤중에 다락방에 숨어 있다가 적발되어 고초를 당하거나 억울하게 죽어야 했던 일들이 바로 우리들의 부모와 삼촌들의 역사다. 이런 역사를 겪어 온 한민족에게 "안녕하십니까?"라는 인사법이 우세를 점하면서 퍼져 간 것은 오히려 너무 당연하다.
 
식사 표현이 인사말을 구성하고 있다는 것은 그 말을 사용해온 공동체가 끼니 걱정을 많이 하면서 살아온 민족이라는 반증이다. 오죽하면 세상에서 가장 넘기 힘든 고개가 보릿고개라는 말이 생겼겠는가? 그 인사말이 기분이나 감정을 묻는 형식이라면 그 공동체는 매우 풍요롭고 평화로운 역사를 가진 민족일 가능성이 크다. 여기서 평화롭다는 말은 전쟁이 적었다는 뜻이지 평화를 사랑한다는 뜻이 아니니 오해하지 말라.
 
살람 말레꿈이 평화 애호의 상징이라고?
 
진중권이 문화코드를 해석할 수 있는 제대로 된 시각이 있었다면 "살람 말레꿈-너희에게 평화를"에서 평화를 읽어내기 보다는 전쟁으로 점철된 고통의 역사를 읽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아랍의 역사를 읽어 보라. 그들의 역사에서 국가간 또는 부족간의 전쟁이 그칠 날이 거의 없었다고 할 정도다. 말하기에는 좀 그렇지만 형제간끼리 야밤에 기습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들이 일부다처제의 율법을 가지고 있는 이유도 빈번한 전쟁 때문에 남자들이 죽어 나갔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동지역은 현대사에 들어와서도 총성이 그치지 않고 있다. 이규태가 사용한 '호전적'이라는 용어 자체가 우리에게 주는 비호감적 선입견만 제외하고서 냉정하게 보면 크게 틀린 지적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서 호전적이란 뜻은 전쟁이 많았다는 뜻으로 읽어야지 전쟁을 좋아한다 라는 뜻으로 읽으면 그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본래부터 평화를 싫어하고 전쟁을 좋아하는 민족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냉전적', '호전적' 등의 단어를 생각하고 나면 전쟁에 관한 태도를 설명하는 용어가 더 이상 마땅히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또 어떤 민족의 특이성을 논할 때 진중권처럼 개인적 친분에 의한 경험을 바탕으로 논의를 전개하는 방식은 위험천만하다. 오히려 그 민족이라는 집단이 걸어온 오랜 역사와 그 역사 속에 표출된 문화양식을 기준으로 논하는 故 이규태님의 접근법이 훨씬 사실에 닿아 있음은 명확하다. 그들이 복수심이 강하고 잔인하다는 것은 다른 민족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아랍인들 내부적으로는 잘 느끼지 못하고 있는 문제 일 수 있다.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에 숨겨진 아랍인의 문화코드
 
다만 제 3자의 입장에서 그들의 문화를 간접적으로 들여다 볼 수 있는 <알리 바바와 40인의 도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를 생각해 보라. 알리바바의 형님은 죽어서 짐승처럼 껍질이 벗겨지고 40명의 도적은 모두 다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끝맺는다. 죽이는 방법도 귀에다가 끓는 기름을 넣어 죽이는 등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된다. 필자가 문화적인 코드를 담은 이야기를 매우 많은 책을 통해서 다양하게 경험했지만 사람 죽이는 방식을 이렇게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이야기는 별로 보지 못했다. 그것도 인간의 목숨에 비해서는 별 것도 아닌 고작 재산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다. 물론 첫 시작은 물질적인 재산이지만 이야기 전개과정에서 형제의 복수나 재산을 훔쳐간 사람에 대한 응징이나 보복도 얽힌다.
 
이게 단순한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문화와 상징에 대한 공부를 더 하기 바란다. 하필이면 왜 40인의 도둑이냐고? 그건 진중권이 생트집을 잡은 이규태의 바로 그 칼럼에도 나와 있다. 이 40이라는 숫자코드를 풀어 줄 단서를 밝혀 줄 故 이규태님의 문제의 그 칼럼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아랍인들은 어머니 뱃속에서 수태된 지 40일 만에 알라신의 장부에 그의 숙명이 치부되며 그 숙명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확신한다(이규태--아랍인의 의식구조)"
 
이규태의 이 표현대로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에 나오는 등장인물들도 단순한 우연으로 시작되지만 결국 서로 죽고 죽여야만 하는 지독한 운명에 얽힌다. 보다시피 이런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숫자는 명목상의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읽어 내고 말고는 독자의 몫이다. 신밧드의 모험이 해양으로 진출한 아라비아 상인들의 이야기라면 <알리바바와 40인의 도둑>이야기는 유목민들 약탈경제를 암시하고 있다. 이 이야기에는 한국의 이야기에 으레 나타나는 권선징악이나 선악의 개념도 모호하다.
 
이 이야기는 아랍 사람들과는 친구는 될지언정 적은 되지는 말아야 한다고 충고 할 때 쓸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될 만하다. 내가 보기엔 미국의 부시나 네오콘 세력들이 이런 사실을 너무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필자가 빈 라덴 때문에 미국에서 부시가 재선에 성공하는 것은 당연하며 미국의 부시는 폭력조직이라는 국가의 우두머리로서 보복 전쟁을 선택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또 그 전쟁으로 후세인 실각에 성공한다고 한들 미국이 바라는 정부 형태의 설립은 단기간의 성과에 그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런 시도는 아랍 사람들의 문화양식에서 비롯된 거센 반발에 부딪혀 반드시 실패할 것이라고 대자보에 "부시 재선, 국가의 의미와 문명의 위기(클릭)"라는 제목으로 밝힌 글에서 밝혔다. 또 그 글에서 필자는 미국인들이 위험을 당했을 때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대해서 '애기를 안고 있는 여성이 야수를 만났을 때의 행동양식'을 비유로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사담 후세인이 이끄는 이라크가 쿠웨이트에 있는 석유자원을 얻기 위해 쿠웨이트를 공격한 걸프전쟁(1990년)때 미국을 위시한 유엔 연합국이 참전하자 이라크를 옹호하고 미국을 비난하는 학자들 중 상당수는 미국이 아랍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참견한다고 한 적이 있다. 즉 아랍문화권에서 약탈경제를 위한 전쟁은 그들의 문화코드 중 중요한 요소인데 웬 참견이냐? 그런 뜻이었다. 즉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지지하는 그 학자들도 아랍인들의 호전성만은 기본 전제로 인정하고서 의견을 개진한 것이다.
 
천일 야화로 유명한 아라비안 나이트의 시작은 어떠한가? 남성 우월주의 문화의 상징적인 문화코드인 여자의 정조나 정절 때문에 왕은 결혼 첫날밤이 지나면 신부를 물에 빠뜨려 죽인다. 이건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도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 한다. 이런 것을 아랍 사람이 아닌 외부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잔인하다는 표현이 크게 무리가 아니며 충분히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들은 체면과 명예도 매우 소중히 여긴다. 그런 부작용으로 21세기인 현재 한 무슬림 국가에서는 매년 500 명 이상의 여성들이 단지 정조 문제로 명예 살인을 당한다. 명예 살인이란 어떤 여성이 정조나 정절을 훼손하여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는 이유로 남도 아닌 그 여자의 가족이나 친족에 의한 살인을 말한다. 2005년 세계 여성 인권상에 뽑힌 여성은 무슬림 부족에서 집단보복 성폭행을 당하고도 보통의 경우처럼 자살하지 않고 대항했던 한 여성이었다.
 
몇 달 전 외신에는 한 무슬림 소년이 배고파 빵을 훔쳤다는 이유로 손 위로 트럭이 지나가는 형벌을 받았다. 그들의 율법이 이러한데 외부 사람들의 눈에 잔인하다는 표현이 안 떠오를 수 없다. 이태원에 있는 해밀턴 호텔에 있는 '아쇼카'나 크라운 호텔로 가는 길목에 있는 '알사바'라는 무슬림 레스토랑에서 바이어랑 식사를 할 때 간혹 옆 테이블에 한국의 여대생 정도로 보이는 젊은 여성들이 둘러앉아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을 때가 있다. 바이어가 잠시 쳐다보고 있다가 하는 말은 으레 다음과 같다. "어메리칸 웨이(American Way)가 한국을 다 망쳐 놓았다. 여자들은 집안에 조용히 있어야지 저렇게 돌아 다니면서 떠들면 안된다." 물론 그와 나는 친구 사이이기도 하지만 이럴 때면 그가 한없이 불쌍하게 보인다. 그래서 나는 이런 말을 심심찮게 말한다. “여성은 일단 나라를 잘 타고 나야 한다. 그 다음 아버지를 잘 만나야 한다.” 아랍지역에서 여자가 운전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혼자 승용차도 못 모는 것은 그들의 율법인데 얼마전 이집트인가에서 첫 여성 택시기사가 나왔다고 해외토픽에 나온 적이 있다.
 
 중세 시대 지구상에서 가장 찬란한 문화를 꽃피워서 서구 르네상스의 원동력을 제공하는데 큰 역할을 했던 아랍 문화가 왜 이렇게 까지 정체되어 버렸는지 모르겠다. 필자는 한국에 무슬림 이민자가 20만 명 정도만 초과하게 되면 한국 사회는 분명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최근 들어서 이민족에 대해 가장 관대하다는 네델란드 까지 아랍인들에 대한 이민절차를 매우 까다롭게 하고 있다고 한다. 그 절차가 하필이면 포르노 영화를 두시간 이상 볼 수 있어야 한다니 과연 네델란드다운 발상이다. 사해동포주의라는 이상만 가지고는 현실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을 다 감당할 수 없기에 이런 식의 이상주의 퇴조현상이 생기는 것으로 본다. 한번씩 부화가 나서 "무슬림은 왜 일부 다처제냐?"고 웃으면서 슬쩍 염장을 찔러 보면 마치 이규태가 그 칼럼에서 말한 내용을 외우기라도 했는지 모범답안이 나온다. 수많은 포교활동(전쟁)으로 남자들이 많이 죽어서 남겨진 여자들을 책임지기 위한 알라신의 배려라고.
 
무슬림의 역사를 알면 알수록 그들이 '복수에 민감하고 호전적'인 민족이라는 말에 수긍하는 사람이 많아질 것이라고 확신한다. 혹시나 진중권처럼 오해를 한 나머지 과도하게 흥분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 꼭 지적해 두고 싶은 말이 있다. '복수에 민감하고 호전적'이란 말은 '적(敵)에 향한 그들의 대응방식'을 하나의 문화특성으로 규명한 것이지 인종주의적 편견인 '그들의 심성이 악하다'는 뜻하고는 전혀 다른 차원이라는 것을. 물론 적(敵)이 아니라 친구 사이일 때는 더할 나위 없이 친근하다.
 
다만 故 이규태님이 연재한 비교문화 코너는 긴 논문이나 책이 아니라 매우 짧은 지면에 마무리해야만 하는 관계로 약간의 논리적 비약은 구조적으로 내포된 문제였다. 그런데 그 글에 나온 옥의 티를 의도적으로 침소봉대해서 인종차별주의자 운운한 진중권의 특이함은 단순 무식한 멧돼지가 가진 저돌성(猪突性)이 아니면 제대로 표현할 방법이 없다. 이 저돌성의 기본적인 속성이 전후좌우를 종합적으로 볼 수 없는 좁은 시야 즉 편협함과 무식함이다. 그때 진중권이 보여준 것은 평생을 비교 문화학을 연구하며 쌓아온 故 이규태님의 투철한 장인(匠人)정신에 대한 심각한 모독이기도 했다.
 
'호전적'이란 용어의 문화적 해석
 
 우리는 '호전적'이란 말과 '평화 애호적'이란 용어의 쓰임에 대해서 근원적인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따져 보면 평화를 싫어하는 민족이 어디에 있겠는가? 또 전쟁을 좋아하는 민족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 질문에서 한 발짝만 더 나가보자. 그러면 어떤 민족은 호전적이고 어떤 민족은 평화 애호적이라는 표현이 왜 생겨났으며 이런 표현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이 두 용어가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그 민족의 역사에 있어서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 목적을 달성할 때, 대화와 타협이라는 평화적인 '방식'을 많이 취해 왔는가 아니면 전쟁과 격렬한 투쟁의 '방식'을 많이 취해 왔는가 하는 차이점에 있다. 이것은 다른 민족의 역사와 비교해서 발생하는 상대적인 빈도의 문제이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호전적이라는 말을 전쟁을 즐기는 전쟁광 정도로 잠못 이해 하고 있다. 물론 이런 오해를 받지 않고도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정확히 나타내는 더 좋은 용어가 있었다면야 이규태도 분명히 그 용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용어는 없고 이규태가 사용해야 할 칼럼의 지면은 너무나 한정되어 있었다. 자세히 읽어보면 이규태는 짧은 지면에 가급적 더 많은 내용을 담기 위해서 마침표보다는 쉼표를 많이 사용하여 여러 문장을 한 문장에 연결하는 문체를 쓰고 있다. 무더운 여름은 맹하로 혹독한 더위는 혹서로 혹독한 추위는 혹한으로 그것도 괄호 안에 한자도 사용하지 않으면서 쓰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호전적이라는 단어를 다른 좋은 말로 길게 풀어서 묘사하지 않았다고 독자가 생떼를 쓰며 달라 드는 일은 과연 정당한가?
 
진중권은 이규태를 인종주의에 기반한 망언을 일삼는 몰상식한 인간으로 몰아 부치면서 그 절반은 살람 말레꿈에 대한 인상비평에 기반하여 그들이 평화애호의 민족이며 또 환경결정론이 19세기 케케묵은 이론이라서 고려할 가치가 없다는 주장을 폈다. 그 앞 부분은 자신이 문화에 대해서 얼마나 무식한가를 제대로 나타내는 데 충분히 활용한 셈이다. 그 나머지 절반은 엉뚱하게도 미국의 호전성을 부각하는데 할애했다. 마치 이규태가 그렇게 하지 않았음에 분노를 느꼈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이규태는 그의 칼럼에서 미국(米國)이 평화 애호적이라거나 호전적이라는 표현은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게다가 9·11 테러가 범죄라느니 미국의 보복이 정당하다느니 하는 말도 전혀 내비추지 않았다. 그저 제목 그대로 아랍인의 의식구조를 밝히는 데에 총력을 다하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놀라지 마라. 이규태는 우리가 무심코 쓰고 있는 9·11 '테러'라는 용어조차 쓰지 않고 있다. 테러란 용어 자체가 한쪽을 범죄시하는 단어가 아닌가? 이는 아마도 오랜 기간의 비교문화연구 경력에서 이규태님이 자연스럽게 체득한 객관성의 자세에서 나왔으리라고 생각한다.
 
지하드와 호전성, 배신과 복수
 
아랍인들이 다른 문화 공동체로부터 호전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에는 이 지하드(聖戰)을 빼놓을 수 없다. 이슬람은 복종의 뜻이며 종교 생활은 크게 믿음(信)과 행(行)으로 나누는 데 이 행동윤리에는 5주(5柱) 에다 지하드(聖戰)를 합쳐서 6주(6柱)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평화를 상징하는 것이 보통인 종교에 전쟁이 행동윤리로 들어 있는 점은 다른 종교 문화권에서는 쉽게 이해 하기 힘든 대목이다. 이 지하드는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깐수 정수일 박사가 소개한 지하드의 모습 중 두 개만 소개한다.
 
다양한 성전 지하드
 
이렇게 중요시되는 지하드는 마음으로, 입(말)으로, 손으로, 검(劍)으로 수행해야 한다고 경전은 그 방도를 가르치고 있다. 여기에서 마음과 입으로 한다는 것은 정신적 수행을 말하고, 손과 검(劍)으로 한다는 것은 육체적 수행을 의미한다. 따라서 지하드는 정신 및 육체적 행위 전반을 포괄하는 정교합일의 대표적인 표상이다.
 
지하드에서 노력지하드는 어디까지나 무슬림 개개인의 내면적인 수행문제이기 때문에 별로 논의의 대상이 아니지만, 성전지하드는 여러 가지 사회문제와 법리(法理)문제를 야기해 오늘날까지도 구구한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법학자들은 성전지하드를 대상에 따라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구분하고 그 구체적인 수행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① 다신교자들에 대한 지하드: 유일신을 믿지 않는 다신교자들은 처음부터 가장 완강하게 유일신교인 이슬람교를 반대하고 박해를 가했으므로 그들과는 성전(聖戰)을 할 수밖에 없다.
② 배신자들에 대한 지하드: 이슬람 영역을 이탈하여 전쟁영역에 들어간 배신자들에 대해서는 돌아올 것을 권유하는데, 응하지 않으면 성전을 하되, '전쟁 영역의 사람'들과 동등하게 취급한다. (깐수 정수일 박사의 이슬람문명 산책 7 에서)
 
국화와 칼과 한국인의 의식구조
 
2차대전 중 일본의 카미카제 특공대의 자살행위를 서구 유럽인의 시각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국의 문화인류학자 루쓰 베네딕트 여사가 이 의문을 해결해 주기 위해서 그 이름도 유명한 <국화와 칼>을 썼다.
 
인류사의 위대한 유산으로 칭송하고 있는 문화인류학의 명저들이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논리로 점철해 놓은 논문 양식을 띄고 있을 것으로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다. 이것은 원저자가 직접 쓴 책은 안 읽고 그 책의 서평만 읽은 사람들이 흔히 가지게 되는 오류다. 서평은 분석력이나 종합력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약간의 참고 사항이 될 수 있겠지만, 짧은 지면에 압축해서 보여 줘야 하는 관계로 일반적으로 책 내용보다 어렵다.
 
레비 스토로스의 슬픈 열대, 프레이저의 황금가지, 마가렛 미드의 남성과 여성 그리고 말리노브스키나 래드 크리프 브라운 등의 각종 저서를 직접 읽어보라. 매우 평이한 문체로 읽기 쉬운 수필이나 일기를 보는 듯하다. 각 사안별로 분절되어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들의 저서에서 대단하고 체계적인 이론을 발견해서 세계에 발표한 사람들은 많은 경우 그들의 저서를 연구한 후학들이다. 이는 마치 예수가 대중 속을 다니면서 토막토막으로 가르침을 설파하며 다닌 내용을 그 제자들이 모아서 바이블이라는 인류사의 큰 자산을 만들어 낸 형식과도 비슷하다.
 
이건 각종 문헌을 뒤져서 방대한 자료를 작은 주제를 단위로 엮어낸 이규태의 문화코드 구술양식도 위에 열거한 그 이름도 쟁쟁한 서유럽의 학자들이 사용한 형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 문화에 있어서의 이규태의 업적
 
이규태가 무려 20년을 넘게 투철한 장인정신으로 한국인의 문화코드를 기록하고 서술한 일은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존경을 받기에 너무나 충분하다. 국문학자가 방언이 다 사라지기 전에 전국의 산간벽지를 돌면서 할머니 할아버지들께 막걸리를 대접하면서 그들이 하는 방언이나 구성진 노래 가락 또는 노동요인 농가(農歌) 등을 원형 그대로 녹음해 오는 일은 우리 사회에 대단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런 일이 조금만 더 지체되었다가는 급속도로 진행되는 현대화 도시화의 물결에 그 자취조차 사라져서 나중에는 학술자료나 사료 자체가 없어지게 된다.
 
 문화 인류학적 자료수집도 마찬가지다. 이런 문화인류학적인 풍토를 모르고서 이규태의 글에서 일관된 이론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이는 문화 인류학자에 대한 몰이해에서 오는 과도한 기대에서 출발한다. 어떻게 보면 그의 방대한 저서에서 일관된 이론을 찾아내야 하는 일은 후학들에게 던져진 숙제라 해야 더 정확하다. 설사 그런 이론을 못 찾아낸다 할 손 그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아니 때로는 이론보다 자료가 더 중요할 때도 많다. 왜냐하면 자료는 후학들에 의해서 다양한 이론으로 발전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필자 같은 경우는 의역보다 직역으로 번역된 책을 더 좋아한다. 이론은 내가 만들어 내면 되는 법이다.
 
평생 비교 문화학에 대한 칼럼을 써오는 외곬 인생을 살아온 故 이규태님으로서는 세계인을 깜짝 놀라게 한 9·11 자살 테러 행위를 가능하게 한 ‘아랍인의 의식구조’를 그들의 문화에 대해서 생소한 한국인들이 이해하기 싶게 풀어내고 싶었을 것이다. 그건 전문 칼럼니스트로서의 일종의 책임감이나 부담감으로 여겼을 것으로 본다. 이런 종류의 책임감과 부담감은 필자에게도 가끔씩 심리적 압박을 준다. 게다가 그가 글을 써온 전문 분야가 정치학이나 사회학자가 아니었기에 평이하게 ‘미국이 잘못해서 무슬림들이 반발하는 것이다‘ 라는 식의 시사평론을 쓰기보다는 당연히 그들이 처해있는 환경이나 기후 그리고 그들이 살아온 역사를 기반으로 하여 종합적인 견지에서 문화 인류학적인 접근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한마디만 진중권에게 던져보자. 부시가 전쟁 미치광이고 미국이 호전적이라면 아랍 민족이 호전적이 아니라는 증거가 되나? 이건 전혀 별개로 존재하는 다른 주제이지 않은가? 사실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명의 충돌은 두 문화 사이에서 소통구조가 원활하게 작동되지 않아서 일어나는 일이다. 양자가 서로를 인정하면서 대화와 타협을 통하기보다는 한쪽을 인정하지 않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 할려고 하니까 충돌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런 경향을 평하자면 두 문화 모두 호전적인 경향을 띄고 있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논점에서 한참 벗어난 동문서답식 흥분은 진중권의 고질병인 것 같다. 강정규 교수가 6·25는 통일전쟁이었다고 했을 때 그는 '그럼 통일하자고 전쟁하자는 말이냐?'라는 말을 대중 앞에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용맹무쌍함을 보여 준 적이 있다. 초등학교 학생들도 국사 선생님이 '고구려 백제 신라간의 삼국전쟁은 민족통일전쟁이었다'라는 말을 할 때 그럼 남북통일을 하기 위해서 전쟁을 해야 하나요? 하는 식의 황당한 말을 하지 않는다. 진중권이 이런 말을 하고 나서 강정구 교수에게 '진중권은 미친 사람이 분명하다'라는 말을 들은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무식한 진중권의 폭력과 억울한 이규태
 
이규태는 그 글에서 9·11 테러에 연관하여 아랍인들의 문화적 특성을 이야기했지 미국의 보복 전쟁이 정당하다든지 그 전쟁을 지지한다든지 또 한국도 군대를 파견해야 하는지 그에 반대하는지 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부분은 단 한자도 없다. 심지어 미국에 관해서 언급한 단어도 단 한군데도 없다. 억지로 미국에 관련된 부분을 찾아내라면 '쌍둥이 빌딩이 폭파되건 펜타곤이 폭삭하건'에 나오는 ‘쌍둥이 빌딩’과 ‘펜타곤’이란 딱 두 단어 뿐이다. 그것도 미국인의 행동특성을 말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아랍인의 행동약식을 설명하고자 마지못해 넣은 부분일 뿐이다. 대중들이 이 칼럼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는 부분은 진중권의 기막힌 거짓 선동술로 꾸며낸 소설에 의해 2차적으로 과장되고 가공된 이미지다.
 
이규태의 칼럼을 냉정하게 읽지 않고 진중권의 소설을 서평으로 더 많이 읽고 그게 사실인양 잘못된 결론을 내리고 이규태를 이지매하는 대열에 불나방처럼 뛰어들었을 뿐이다. 필자의 지적이 틀렸는지 이규태가 쓴 텍스트를 진중권의 글과 비교해서 자세히 보기 바란다.
 
진중권의 과대망상과 편집증
 
'아랍인의 의식구조'라는 제목의 칼럼에 왜 '미국인의 의식구조'를 쓰지 않았냐고 트집을 잡고 생떼를 쓰며 달려드는 진중권의 정신에 심각한 장애가 있음이 확실하다. 굳이 미국인의 의식구조에 대해서 故 이규태님의 고견을 알고 싶었다면 e-mail 이나 독자 투고 등으로 정중하게 요청을 하면 될 일이었다. 이규태가 하지도 않은 말을 그저 혼자의 상상으로 소설을 쓰면서 남을 공격하는 것은 어디서 배운 버릇인지 모르겠다. 이건 무식함을 넘어서 무책임하고 야비한 방식이라는 비난을 들어야 마땅하다.
 
9·11 세계무역센터 폭파 사건으로 일시적인 정신외출 증상이 발생하지 않고서야 진중권이 이규태 칼럼니스트에게 저런 망언을 하면서 공격할 이유가 없다. 진중권의 정신병증은 아마 과대망상에서 오는 편집증 정도 될 것이다. 이규태는 이렇게 정신적 쇼크를 받은 사람들에게 나름대로 그 문화적인 이해를 통해서 치유를 해주려고 시도했다가 도리어 환자에게 봉변을 당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중권이 저열하게 제목을 '황인종의 백색신화'라고 도발적으로 잡으면 이규태가 한국에 사는 황인종으로서 백색신화를 신봉하는 사람이 되는가? 이규태의 그 글에는 아랍인의 행동이 그르고 미국의 행동이 옳다 라는 투의 글은 단 한자도 없다. 이규태는 학자적 양심을 걸고 문헌과 고증에 의해 실증주의적 자세로 그 글을 썼을 뿐이지 백인종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려고 쓴 것이 아니다. 근거 없는 인민재판도 정도껏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진중권처럼 망언을 하려면 적어도 이규태가 쓴 그 글에서 구체적인 근거를 찾아내야 하는 것은 지식인으로서 자기 자신에게 해야 할 도리다. 그 글에서 못 찾겠으면 이규태가 지난 20여간 쓴 글을 다 뒤져서라도 이규태가 '친미 사대주의적인 발언'을 한 대목이나 ‘미국의 제국주의를 옹호하며 돌격대 역할을 한 대목’을 찾아와서 공격해야 하는 것이 기본 양심이다. 남을 공격하기 위해서 근거를 찾지 않고 소설을 써대는 것은 정신병자가 하는 짓이지 지식인의 자세가 아니다.
 
 필자가 독자들의 객관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서 그때 이규태가 쓴 '아랍인의 의식구조'를 '일본인의 의식구조'로 바꿔 비슷하게 재연해 보겠다.
 
일본은 섬나라로 갇혀 살았기에 대륙에 대한 막연한 동경을 갖고 있다. 이것을 이용하여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을 일으켰고 일본의 군벌세력들은 대동아 공영권을 내걸고 2차 대전을 일으켰다. 일본인은 섬나라에 갇혀 있다는 의식 때문에 오히려 이어령이 말한 작은 것을 숭상하는 문화를 낳았다. 실제로 그들은 키도 작았다. 일본을 가르치는 왜(倭)라는 말도 작다는 뜻이다. 성문화는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매우 개방적이고 우리가 보기에는 문란하다. 대체로 소심한 기질을 갖고 있는데 이것이 남에게 지나칠 만큼 인사를 하는 풍속을 낳았고 섬나라 특유의 고립감에서 연유된 정신적 폐쇄 감은 자살을 미화하는 풍속을 낳았다. (중략)
 
카미카제(神風)는 원래 바다에 이는 태풍을 뜻하는 말이다. 고사기(古事記)나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있는 일본의 건국신화에 따르면 태초에 땅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바다가 있었다. 아마테라스 호호니니기 등으로 이어지는 천손이 일본 천황의 모태가 되는데 이들 모두 그 원류를 따져보면 바다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인들은 이런 신들이 일본 천황을 보호하고 일본을 보호하고 있다는 의식을 굳게 간직하고 살았다. 몽고가 고려와 연합하여 두 차례나 일본 열도를 공격했을 때도 그때마다 카미카제(태풍0가 불어서 일본에 상륙도 못한 채 패퇴한다. 이때도 일본인들은 카미카제(神風)가 일본을 보호했다고 믿었다. 2차대전 때 미국의 참전으로 일본이 패전할 기미가 보이자 자살특공대를 조직하는 데 이들이 바로 카미카제 특공대다. 이들이 비행기를 타고 미국 함대를 향해 자살 공격을 감행하면서 한결같이 외친 말은 "천황폐하 만세!" 였을 것이다.
 
 윗 글에서 보다시피 이규태의 그 글은 아랍인과 일본인이라는 말만 달랐지 필자가 쓴 글과 그 흐름이나 정도가 별반 차이가 없다. 이규태가 부시나 미국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의 언급조차 안했는데 진중권 혼자 흥분해서 생난리를 치고 있는 현장이다. 이런 글을 보고 웬 암몬신이 나오고 '부시님께서 원하신다면' 하는 망발이 나와야 하는 지 어안이 벙벙하다. 억지와 비논리로 점철된 진중권의 소설은 대중을 극단적으로 흥분시키는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래서 그 글을 썼던 이규태 칼럼니스트는 대중의 무지막지한 폭력 앞에 '내가 일평생 동안 무엇을 위하여 글을 왜 써왔지?' 하는 심한 자괴감에 빠졌을 것이다. 아니 좀더 부지런하게 글을 써서 이런 사람들을 깨치지 못한 벌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고 반성했을 지도 모른다.
 
‘한 손엔 꾸란, 한 손엔 칼‘의 역사와 아랍인의 극단성 코드
 
 ‘꾸란(코란)이 아니면 칼을!‘이란 극단적인 말이 풍미했던 아랍의 역사에서 보듯이 그들의 조상은 선교를 위해서도 전쟁이란 수단을 사용해 왔다. 물론 서구 유럽은 선교를 제국주의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해 온 역사가 있다. 이에 반하여 아랍 지역은 선교를 위해서 전쟁을 수단으로 사용한 경우다.
 
아랍 민족들이 다른 민족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극단적이라거나 호전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은 그들의 역사를 제대로 아는 사람들의 시각으로서는 크게 무리 있는 표현이 아니다. 또 이런 역사적인 분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남들이 잘 모르고 있는 부분까지 찾아낸 후에, 故 이규태님이 중동지방의 극과 극을 달리는 기후와 고원지역의 생활 환경 등을 예를 들며 그 연원을 찾아간 분석은 절대로 비과학적인 분석법으로 치부될 수 없다. 게다가 이런 분석으로 인해서 인종주의 망언으로 비난받을 일은 더욱 아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쉽게 과거사를 잊는 것은 사계절이 뚜렷하게 변하는 까닭과도 연관이 없다고 누구도 말하지 못할 것이다. 겨울에 입었던 두터운 외투를 장롱 속에 깊숙이 넣어두고 가볍고 화사한 옷으로 바꿔 입어야 하는 습성을 만들었을 것이고 이런 습성은 또 한민족의 의식세계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래서 환경결정론은 인간의 생활양식을 설명하는데 매우 유용한 과학적인 접근법 중의 하나다.
 
환경결정론 환경가능론 문화결정론
 
환경결정론 환경가능론 문화결정론 등은 모두 인류 문화를 해석하는 데 모두 유용한 데이터를 제공해 주는 과학적인 방법이다. 여기서 환경결정론은 이 모든 과학적 접근법을 낳은 뿌리며 모태다. 한반도 북쪽 지방에는 추운 관계로 폐쇄적인 가옥구조를 갖고 있고 비나 눈이 많이 오는 울릉도 지역에서는 지붕이 가파르다는 식의 인과 관계를 밝히는 접근법이 환경 결정론이다. 환경결정론이나 환경 가능론은 그 자체가 진리에 도달하고자 하는 과학적 방법론의 하나이며 수단적 성격의 논리체계다. 따라서 환경 결정론에 기반했다고 평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굳이 그것을 이유로 비난받아야 할 내용은 아니다. 이것을 보고 비난할 대상으로 몰고 가는 것은 비교 문화학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되고 있는 일임에 분명하다. 쉬운 예로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주의적 접근법을 취했다고 평할 수는 있지만 구조주의적 접근법을 취했다고 비난해서는 안 되는 이유와 궤를 같이 한다. 왜냐하면 수단으로서의 과학적 방법론에서 완벽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다만 글을 읽는 우리는 그런 한계를 사전에 알고 읽으면 된다. 그러면서 환경결정론이든 환경가능론이든 아니면 문화결정론이든지 간에 그런 연구를 해서 발표한 사람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서 취사선택하여 자신이 축적한 다른 데이터와 함께 종합적인 견지에서 판단하면 된다. 
 
인종주의 망언과 진중권의 망언
 
 망언? 이규태가 쓴 글 중에서 망언은 한 군데도 없었다. 그 글을 지적 능력의 부족으로 인상비평 정도로 피상적으로 이해한 나머지 진중권이 평한 인종주의 망언이야 말로 진정한 망언이었다. 망언이라면 ‘카미가제 정신으로 천황폐하께 청춘을 바쳐라’나 ‘조센진은 씨를 말리자’ ‘자살폭탄을 안고 미제의 심장부로 돌진하라’ 이런 정도일 것이다.
 
 여기에 굳이 자살폭탄 이야기를 넣는 이유로는 필자가 부시를 좋아하지 않지만 빈라덴 같은 사람도 좋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한가지 확실하게 터득한 진리가 있다면 남보고 희생(犧牲)하라고 말하는 사람치고 악마와 비슷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점이다. 내가 생각하는 희생은 남한테 말하기 전에 자기 스스로 솔선수범해야 해야만 하는 것이다.
 
 영화 클리프 행어(Cliff Hanger)에는 이 희생(犧牲)의 본질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명징하게 보여준다. 현금수송 비행기를 납치한 일당들이 하얀 설원으로 덮힌 로키 산맥을 지나면서 식량부족인가 하여튼 일행 중 한 명을 죽여야만 하는 상황에 봉착한다. 이때 그 두목이 가장 친한 여자 동료의 머리에 총구을 겨눈다. 그녀가 설마 하는 두려움의 눈초리로 응시할 때 그는 비정하게 방아쇠를 당긴다. 그러면서 싸늘하게 내뱉는다. 희생!(Sacrifice)! 필자는 이 세상에서 남보고 희생(犧牲)하라고 말할 때의 모습이 가장 정확하게 표현된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감독이었다면 그 단어를 메아리로 몇 번이고 증폭시켰을 것이다.
 
 필자 생각엔 남에게 희생하라는 말을 내뱉는 인간치고 사이비 교주나 악당이 아닌 경우는 없다. 내가 북한의 인권법안에 반대하는 무리들이나 김정일을 싫어하는 이유도 바로 이 점에 있다. 민족 주체 강성 대국을 위해서 인민들이 희생하고 참아라고? 그런 말을 하는 인사들을 볼 때 마다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 웃기지 마라! 네가 먼저 굶고 네가 먼저 희생해라. 김정일이 솔선수범해서 희생하고 북한 인권 법안 통과를 반대하는 너희들이 수용소에 갇혀서 인권 유린을 당해봐라. 나는 이런 사람들에게서 비수같이 차가운 위선과 사악한 악마성을 발견한다.
 
집단에 귀속시켜 말하는 게 인종주의라구?
 
 이규태가 말한 극단적이거나 다혈질이라거나 복수에 민감하고 호전적이라는 말이나 또 세계무역센터로 돌진하면서 인샬라를 외쳤을 것이다 라는 말이 망언이라면 세상에 망언이 아닌 말이 얼마나 될까? 이렇게 평범한 문화 평론도 진중권에 걸리면 졸지에 망언(妄言)으로 둔갑한다. 진중권처럼 망언이란 용어를 좋아하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몇이나 있을까? 진중권의 괴상한 망언명명 개그 시리즈는 이규태를 넘어 한승조 조갑제 지만원 기타에 까지 이어진다. 내가 보기엔 진중권은 책을 일기보다 신문의 헤드라인 기사를 너무 많이 본 것 같다. 좀 지나면 필자인 이 김휘영에게도 이상한 꼬투리를 잡아 망언이란 말을 붙이지 않을까?
 
 진중권은 인종주의란 용어의 뜻이나 제대로 알고 있는가? 개인보다 집단의 특성을 말하는 것이 인종주의라면 모든 비교문화학적 저술은 인종주의 망언으로 가득 차 있을 뿐으로 학문적 가치는 단 한 줄도 없게 된다. 인종주의란 예를 들어 ‘흑인은 게으르고 지능이 낮고 책임감이 없으며 신의가 없고 강간 살인 절도 등 범죄를 잘 저지른다‘ 식의 경멸조가 주조를 이루고 있다. 필자는 놀랍게도 노벨 평화상에 빛나는 알버트 시바이처의 자서전을 보면서 흑인에 대한 그의 작은 편견을 피력한 대목을 발견한 적도 있다. 개인을 집단에 귀속시켜 집단적 특성을 밝혀 말하는 접근법은 문화인류학에서는 피할 수 없는 숙명과 같은데 이를 모르는 진중권의 오해나 무지에서 나온 말일 뿐이다. 문화인류학은 부족(tribe)으로 표현되는 집단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런 관계로 이규태의 글에서 수니파니 시아파가 나오고 그 특성을 말해야 하는 이유도 지극히 당연하다. 개인은 윤리학이나 체육학의 대상이라고 해야 올바르다.
 
칼럼니스트 이규태가 쓴 글에서 그 표현이 좀 조심스럽지 못했다고 우려될 부분이 일견 보이긴 했다. 하지만 상기와 같은 인종주의적 편견은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았다. 함족 셈족이라는 표현도 진중권이 혼자 했고 안티새미티즘이니 황색 백색이라는 피부색에 대한 언급도 진중권 혼자서 했을 뿐이다. 그리고 필자는 세계 무역 센터를 향해 돌진하던 사람들의 마지막 말이 ’인샬라'였을 것이라는 말에도 십분 동의한다. 그건 나말고도 아랍의 문화양식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아니 진중권은 제외한다. 은근히 아랍인들과의 친분이 많았음을 과시한 진중권이 그들과 하루 이틀만 같이 있으면 도저히 듣지 않을 수 없는 말인 '인샬라!' 를 못 들었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이 하는 말의 진정성을 누가 믿겠는가? 설마 진중권은 비행기를 타고 자살 폭격을 감행하면서 "살람말레꿈-너희에게 평화를'이라는 말을 했을 거라고 믿고 있다는 말인가?
 
IBM과 무슬림
 
 아랍 문화를 접할 때 처음으로 배우게 되는 것은 IBM(인샬라, 부크라, 마알리쉬)이다. 인샬라(신의 뜻대로) 부크라(내일) 말리쉬(걱정 말아라)인데 이는 비아랍권 사람들을 질색하게 하는 문화다. 물론 이들의 문화에 젖어들면 약간의 여유를 느끼게 되는 점도 있다. 하지만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불확실성을 줄여가야 하는 속성 때문에 솔직히 난감함을 감출 수 없다.
 
 IBM 중 그 첫 번째가 인샬라!고 이 용어로 이규태를 공격해 간 사람이 진중권이다. 아랍인들은 저녁약속을 하고 헤어질 때도 인샬라. 내일 8시에 미팅 약속을 약속할 때도 인샬라!다. 물론 그 시간에 가 보면 태연히 딴 짓을 하고 있기 일쑤로 한 시간 정도는 기다릴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무슬림 바이어가 한국에 들어오면 이젠 내가 좀 늦게 나가기도 한다. 물론 이때 전화를 미리 해 주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화를 내는 법은 없다. 한국에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서 나보고 자기 나라에 들어오면 환대하겠다고 정식 초대를 하면 나는 스케줄 상 확답을 하지 못하고 빙긋이 웃는다. 그러면 5초도 지나지 않아서 오른 손바닥을 내보이면서 인샬라가 나온다. 그땐 나도 손바닥을 쳐 주면서 인샬라!다. 그럼 서로 환하게 웃는다. 가게 되고 안 가게 되고는 신의 뜻이라는 의미다. 아랍계 문화와 조금만 친숙한 사람이라면 이 인샬라의 홍수에 흠뻑 젖지 않고는 시간을 단 몇 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눈이 내리네(Tombe La Neize)‘로 유명한 샹송가수 아다모(Adamo)가 부른 샹송 ’인샬라‘는 이렇게 후렴구를 세 번 반복하면서 끝을 맺는다. “인샬라~, 인샬라~ 인샬라~~”
 
장인정신과 멧돼지 정신의 충돌
 
 이규태와 진중권의 충돌은 지성과 반지성의 충돌이다. 문명과 그를 파괴하려는 야만의 충돌이다. 고증과 자료에 충실한 장인(匠人)정신과 단순 무식을 자랑삼는 멧돼지 정신의 충돌이다.
 
 일생을 비교 문화 연구에 바친 이규태로서는 글 줄이나 쓴다는 한국의 지식인들 중에서 ‘살람 말레콤’이란 인사말을 두고 평화 애호의 문화 코드로 해석하는 단순무식한 인간이 있을 줄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또 그런 저급한 수준으로 창피한 줄도 모르고 멧돼지처럼 우두두두 흙먼지를 날리면서 돌진 해 오는 맹목적인 인간이 있을 줄 어찌 알았으랴? 오랫동안 문화비평가란 타이틀을 걸고 대중 앞에 글을 써왔던 진중권이 무슨 이유에서 말미암아서였는지 진정으로 문화를 비평한 글을 한편도 제대로 못 써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고도 남는다. 그가 줄곧 써낸 글은 특별한 전문 지식도 없이 아무나 기분대로 쓰면 되는 정치나 시사비평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가 문화비평을 독자적으로 써 낼 소양도 쉽게 갖출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진중권이 이규태 칼럼니스트에게 폭언을 퍼부은 그 부분을 그대로 돌려주면 ‘무식한 진중권은 남들이 공부할 때 무얼 했는지 묻고 싶다. 故이규태님 보고 고원지대에서 살다 오셨나를 묻기 전에 자기 자신에게 그 나이가 될 때까지 무협지나 읽고 오락실에서 전자오락이나 하면서 놀다 오지 않았는지’를 물어봐야 제격이다.
 
 며칠 전 흑돼지 무리가 농가에 뛰어 들어 온갖 소동을 피우는 광경이 TV를 통해 소개되었다. 흑돼지가 무얼 알겠는가? 그들의 눈에는 산에 있는 풀도 먹이감이고 농민들이 피땀 흘려 가꿔 놓은 보리며 채소도 다 한 끼 식사에 지나지 않는다. 차가 다니는 도로를 쏘다니며 교통사고의 위험까지 높이고 있었다. 하여간 흑돼지들이 하도 요란하게 소란을 피우니까 미디어의 각광은 받는다. 이런 흑돼지의 횡포를 보다 못해 소방수들과 농촌지도소 직원들과 농민들이 합세해서 흑돼지 무리를 우리에 몰아 넣었다. 그 후에 한 농민들이 하는 말이 재미있고 한없이 넉넉하다. “저 흑돼지들도 밖에 쏘다니며 먹이도 없이 얼마나 고생을 했겠어요. 저기 들어가니까 사료를 참 잘 먹고 있잖아요. 쯧쯧“
 
 나는 진중권의 여태까지의 행각에서 이런 흑돼지의 모습을 본다. 진중권은 자신이 자꾸 미디어에 자꾸 등장하는 것이 자신이 똑똑해서 그러는 줄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제발 꿈 좀 깨시기 바란다. 수십 년을 장인정신으로 글을 써온 사람에게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으면서 인종주의 망언 운운하는 것이 어찌 저돌적인 멧돼지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그런 무식한 상태로서는 자신의 삶을 자신의 의지대로 살아 가기는 커녕 불순한 의도를 가진 권력이나 이상한 세력에게 이용당하며 살기 십상이다. 진중권이 농작물까지 마구 파헤치는 흑돼지처럼 문명과 문화에 대한 파괴운동을 하려고 작심하고 소동을 피웠든가? 하여간 흑돼지나 진중권이나 미디어의 눈길을 잡는 데는 다 성공했다. 가히 경축해 마지않을 일이다.
 
 몇 세기에 걸쳐 완성한 아무리 훌륭한 예술품이라도 무식한 한 사람의 망치에 걸리면 파괴는 순식간이다. 진중권처럼 단순 무식함에서 오는 맷돼지 정신에만 투철하면 일순간에 박살난다. 여기엔 논리가 필요 없다. 대중의 감정에 솔깃한 선동과 말초적인 감각만 부치길 수 있는 기교만 있으면 된다.

 사람들이 이규태가 쓴 원문을 면밀하게 비교 분석을 하지 않고 진중권의 글만 본다면 이규태는 영락없는 미제국주의의 앞잡이며 십자군 원정을 부추기는 사이비 기독교 근본주의자다. 하지만 진중권이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다. 진중권 스스로가 비교 문화에 관한 공부를 1년만 제대로 해 보기 바란다. 그러면 저절로 극단주의자와는 거리가 멀어진다. 이것이 문화인류학이 본질적으로 갖고 있는 힘이다. 20년 이상을 비교 문화학을 연구해 온 이규태가 진중권이 몰아 부친 인종주의 망언을 했다고 들을만한 소양밖에 쌓지 않았으리라 생각지 않는다. 그 글을 봐도 후학에게 그런 폭언을 들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필자는 진중권이 그 글로 무슨 말을 하고자 했는지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그 방식이 꼭 수 십년 간 외곬 인생으로 비교문화를 연구해 온 ‘위대한 장인(匠人)’에게 하지도 않은 말을 했다고 생트집을 잡는 방식으로 했어야 했느냐 하는 점이다. 그냥 이규태와는 별개로 주간 동아 등 다른 잡지에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해야 옳지 않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너무 야비하고 저열한 방식이다.
 
환경결정론과 목마른 케냐
 
 환경결정론이란 울릉도에 있는 가옥의 지붕이 가파른 것은 비나 눈이 많이 오기 때문에 그렇다고 이해하기 위함이고 아랍인들이 극단적이라면 그건 기후나 고지대에 살아 왔기 때문에 그렇다는 식으로 다른 사람들이 쉽게 이해하기 위함이 주 목적이다. 결정론이란 말 때문에 크게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은 뭘 잘 모르는 사람이다. 과학적인 방법론 불과하기에 취사선택과 최종 선택은 본인들의 몫이다. 환경결정론이 케케묵은 이론에 불과하다고? 뭘 모르면 이렇게 아무렇게나 말할 수 있는 법이다. 요즘에는 유전공학의 눈부신 발전에 따라 유전정보가 해독됨에 따라 유전자 결정론까지 나왔다. 환경결정론에 의한 분석이 인종주의적 망언이라면 인종주의와 결정적인 연관성을 갖고 있는 유전자 결정론의 의한 분석에는 어떤 명칭을 붙여야 하나?
 
 내가 생각하는 환경결정론 환경가능론 문화결정론은 똑같은 중요성을 갖고 있지 않다. 얼마 전 TV에서 <케냐는 목마르다> 라는 프로그램을 방영했었다. 야생 동물의 낙원이었던 케냐에 비가 내리지 않는 건기가 계속되자 어떤 비참한 상황이 전개되는지 실증적으로 보여주었다. 세렝게티 야생동물 공원의 동물들이 질병과 굶주림에 죽어가고 도로에 늘어선 케냐 어린이들은 손에 프라스틱 용기를 항상 들고 다닌다. 3일 동안 물 한 모금 못 먹었다고 말하는 어린이들이 혹시 물을 담은 트럭이 지나가면 즉시에 그 용기를 들고 줄을 선다.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는 소방차 모양을 한 물탱크들이 물장사를 하느라고 바쁘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용맹하다는 마샤이 족은 자신들의 터전을 버리고 염소를 끌고 도시 나이로비에 몰려왔다. 대도시는 원래 수원(水源)이 될 큰 강이 없으면 형성되지 않기 때문에 도시에는 그래도 물이 있고 목초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몰고 온 염소를 한 마리씩 팔아서 생활해온 그들은 몹시 불행하다고 말한다. 그들은 비가 와서 자신들이 살던 옛 터전에 목초가 자라면 언제든지 돌아가겠다고 말하고 있다. 이 모든 사회현상이 환경의 변화가 인간에게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치는지를 웅변해 준다.
 
19세기 환경결정론에 반하여 가장 최근에 나온 학설인 문화결정론을 내 나름대로 비교 분석해 보겠다. 문화 결정론을 말하는 학자들이 드는 예는 대개 다음과 같은 구조를 띄고 있다.
 
 캘리포니아에 이민 온 여러 민족들의 농경형태를 살펴보면 LA한인은 쌀을 심고 빵을 먹고 살았던 유럽인이나 아랍인들은 밀을 심는 등 그 행동주체들이 가진 문화양식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수준에서 좀 더 깊이 들어가 보자. 그 문화의 차이라고 들고 있는 미곡 문화와 밀 문화가 근본적으로 무엇 때문에 형성된 것일까? 한국인은 한반도에서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기 전의 환경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미곡을 경작하고 먹는 문화를 만들지 않았는가? 내 생각에는 이 사람들이 쌀을 심고 밀도 심을 수 있는 것 또한 캘리포니아란 땅이 관개가 잘 되어 있고 기온도 맞아서 쌀과 밀 중 어느 것을 심어도 잘 자라는 환경이게 가능한 이야기다. 그들이 애리조나 같은 사막 지역에 이민 가서도 이런 행복한 선택권을 가지리라고 보지 않는다. 그들이 그런 선택권을 가질 수 있는 것 자체가 자연이 부여한 것이다.
 
한인 이민 1-2세대는 모국어를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문화결정론적이라 해도 크게 무리가 없다. 하지만 이민 5세대 정도만 거치고 나면 그들이 쓰는 모국어도 바뀌어져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현상은 문화결정론으로 봐도 일견 타당하고 환경결정론으로 봐도 또 타당하다. 단기간의 현상은 문화결정론으로 설명이 되지만 장기적으로 갈수록 환경결정론이 훨씬 설득력을 얻는다. 이러한데도 환경결정론이 19세기 케케묵은 이론이라서 별 볼일 없다고 주장하는 진중권은 왜 기원 전후에 발생한 기독교를 보고 케케묵었다는 표현을 쓰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문화결정론이란 냉정하게 평가하면 환경결정론의 상대 개념이라고 하기에는 그 이론적 토대가 너무 취약하다.
 
문화결정론 환경결정론 환경가능론의 관계에 대한 고찰
 
이런 까닭에 문화결정론은 환경결정론과 다른 나무가 아니라 환경결정론이란 나무에서 자란 다른 가지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더 올바르다. 환경가능론조차도 그들이 환경을 개척하는 방식이 그 환경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물질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환경결정론의 틀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다. 강물이라는 지역상의 장애를 정복하는 방식으로 배를 만들었지만 그 배의 재료는 각기 다르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파피루스를 엮어서 배를 만들고 통나무가 북미 지역에서는 통나무배를 만든다. 얼음이 꽁꽁 얼고 눈이 많이 오는 에스키모 지역에서는 개 썰매를 사용한다. 말을 사용하는 마차의 사용은 그렇게 춥지 않고 목초가 자라는 지역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이렇듯 환경을 극복하며 살아간다는 환경가능론의 주장조차 그 극복하는 방식에서는 너무나 환경결정론적이다.
 
 문화인류학이나 인문지리학에서 환경결정론 환경가능론 문화결정론을 각기 1/3 1/3 1/3의 비중으로 보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이 세 접근법에서 각각의 중요도는 환경결정론이 약 70%의 중요성을 차지하고 환경가능론과 문화결정론을 합쳐서 약 20%, 나머지 기타 10% 정도의 비중을 갖고 있다고 보아야 제대로 된 분석이다. 특히 문화인류학은 기능적 측면보다는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도 통할 수 있는 인류의 본성과 원형을 연구하는 학문이기에 더욱 그렇다.
 
 내가 보기엔 문화 결정론은 환경결정론이란 나무에서 뻗어 나온 가지(bough)에 불과하고 환경 가능론은 접(接)을 붙혀 자란 가지(bough) 정도다. 환경결정론적 연구방식은 그 효용성이 너무나도 크기 때문에 19세기를 넘어 21세기 아니 31세기가 되어서도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줄 것임에 확실하다. 진중권은 책에서 본 것을 제대로 이해도 못한 채 암기만 하기보다는 이런 식으로 거기서 한 발짝 정도는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길러 보는 것이 어떨까?
 
사실 한국의 일반인들 중에서 중동하면 사막이나 오아시스 정도만 생각하지 파미르 고원(Pamir Plat) 같은 고지대가 있는 줄도 모르고 일생을 마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 지역이 이규태가 말한 혹서와 혹한으로 대별되는 심한 대륙성 기후를 띄고 있다는 사실은 더욱 모른다. 일반인들이 가진 상식은 중동은 ’사막지역이라서 기온이 높고 일교차가 심하다‘ 라는 인문지리 시간에 배운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가 중동 문화와 중동 사람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런 유용한 글이 오히려 더 많이 나와야만 한다. 아쉽게도 진중권이 가진 그 특유의 무식함과 저돌성 때문에 인종주의 망언이라는 폭력까지 당하기는 했지만 故 이규태님과 같이 서재를 뒤지고 철저한 장인정신으로 알곡을 만들어 이 사회의 무지를 일깨워 주는 분들이 더 많이 나와야 한다.
 
안티조선에서 안티포탈 운동으로
 
이제 시민운동도 지난 시절의 타성에서 벗어나야 할 때다. 그 중에서 특히 언론운동은 더욱 그렇다. 가령 안티조선운동을 지속한다 하더라도 이런 야비하고 무식한 방식으로는 시민의 호응을 이끌어 낼 수 없다. 오히려 우리 시대의 살아 있는 문화유산이자 위대한 학자이자 장인(匠人)을 엉뚱한 희생양으로 만들면서 문화를 파괴하는 행동일 뿐이다. 정치적인 목적은 수년을 못가지만 문화적인 가치는 영원히 남는다. 반성 많이 해야 한다. 우리가 흔히 조중동을 말하고 있지만 그들이 과거의 조중동이 아님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세상이 바뀌면 운동도 바뀌어야 한다. 내가 조선일보나 동아일보의 사주라면 수 년 전에 그 주식을 다 처분하고 다른 사업으로 전향했을 것이다. 중앙일보는 신문이 적자가 난다 하더라도 든든한 재벌의 대변인 역할만 하더라도 이사진의 입장에서 충분한 가치가 있을 것이기에 제외한 것이다.
 아직도 대한민국 언론 미디어 중에서 영향력 1위가 조선일보라고 생각하는가? 내 생각에는 조중동 3개를 다 합쳐도 네이버(naver)나 다음(daum)같은 포탈 하나의 영향력을 따라잡지 못하는 시대가 된 지 오래다. 또 대한민국의 대표적 종이신문들인 조중동은 KBS 하나의 위력에도 못 미친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권력에서는 조중동의 횡포가 어떻니 하면서 엄살을 떤다. 그러면 대충 눈치를 차린 어용 시민단체 몇몇이 추임새를 넣어주면서 눈 가리고 아웅을 하고 있다. 국민 세금을 매개로 하여 서로 간에 이해관계가 얽혀있고 여전히 안티 조중동운동에서 얻어낼 표와 반사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안티 조중동 운동의 타성에 못 이겨 여전히 뭇매를 가하는 일은 건전한 시민운동을 넘어서 이젠 일종의 잔인함으로 비춰진다. 이 와중에 걸출한 논객 변희재는 방향을 제대로 잡고 있다. 물론 그의 글은 서울대 미학과 출신 선배인 진중권의 글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점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시민운동은 권력을 견제하는 본래의 역할을 해야 한다. 미디어 언론에서 그 권력지도가 종이언론에서 포탈로 넘어간 지 오래됐다. 이젠 안티조선운동이 아니라 안티포탈운동으로 방향을 바꿔 새로운 권력을 견제해야 할 때다.
 
故 이규태님을 추모하며 
 
▲▲故 이규태 前 조선일보 논설고문     ©조선일보
척박한 한국의 문화풍토에서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몸소 등불로 밝혀 주셨던 별이 지다.
 
솔직히 이규태님이 작고하신 사실을 한달 넘게나 몰랐다. 신문을 안 본지가 제법 오래됐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간결하고 함축적인 문체로 풍부한 사료를 들어가며 정치나 오락 일변도의 신문기사에서 유독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 같은 글을 쓰셨다. 그의 호흡이 멈추자 그의 글이 멈추었다. 말 못할 아쉬움이 밀려온다.
 
 나도 20대 때 그의 글을 보고 적지 않은 영감을 받았다. 돌이켜 보니 내가 그 분에게 해 준 것은 하나도 없으니 일순 미안함이 앞선다.
 
 이규태님은 서구 유럽에서는 국장이라도 지내거나 TV에서 그의 인생을 다룬 특집 다큐멘터리가 나왔을 정도의 한국 문화계의 거목이다. 그런데 현 정부와 조선일보와의 불편한 관계, 그리고 문화에 대한 몰이해 등이 이렇게 그의 죽음을 싸늘하게 바라보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심정적으로 동지가 아닌 적(敵)의 관계라 해도 이건 너무 몰상식한 짓임에 틀림없다. 물론 여기에는 진중권 같은 무식한 인간이 쓴 소설 때문에 그를 오해하고 그에게 무지막지한 돌을 던지며 이지메에 동참한 세력들도 많을 것이다. 그 당시 이 상황을 다 알고서도 몸소 진실을 밝히며 도와주지 못한 나 자신이 한없이 죄송하다. 뒤늦게나마 故 이규태님의 영전에 이 글을 바친다. / 김휘영(문화비평가)
 
‘24년 동안 8391일에 걸쳐 6702회까지 이어진 초유의 신문 고정 칼럼(‘이규태 코너’),
  스스로 주도한 대형 신문 시리즈물 37개, 120여 권에 이르는 저서, 사람 얼굴을 다룬 책만도 30권...‘----한겨레 신문
 “그는 내 소설의 주인공이었지만 이제 나는 그의 독자다.”--- 이청준 (소설가)
 “미국 유학 중 ‘이규태 한국학’을 즐겨 읽었다“ ----도올 김용옥
 “한국에서 거대한 박물관이 하나 사라졌다“---- 무명씨
 “우리는 진정한 문화인의 가치를 알아 볼 줄 모르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무위 김휘영(문화비평가)

 
* 프로그램 상 오류와 무위님이 최종교정본을 보내주셔서 새로 편집했습니다. 독자분들의 댓글이 주렁주렁 달린 기사를 보실려면 <여기를 클릭>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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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4/08 [22:5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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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명의충돌(펌) 2006/04/13 [19:23] 수정 | 삭제
  • 문명의충돌

    인도네시아, 플레이보이 출판 항의 시위

    인도네시아, 플레이보이 출판 항의 시위 [YTN TV 2006-04-13 06:23]
    세계 최대 이슬람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미국의 성인잡지 플레이보이 출판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이슬람 과격단체인 이슬람수호전선 소속 3백여 명은 수도 자카르타에서 플레이보이 출판 중단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일부 시위대는 플레이보이 사무실에 돌을 던져 유리창을 부수었으며 경찰과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지만 부상자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플레이보이는 현지 이슬람단체들의 거센 반발에도 불구하고 지난 7일부터 인도네시아판 판매에 들어갔습니다.
    출판사측은 현지 정서를 감안해 누드 사진을 게재하지 않았으나 인도네시아 일부 정치인들과 성직자들은 플레이보이라는 잡지 이름만으로도 출판을 금지해야할 사유가 된다며 출판금지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습니다.
    플레이보이지인니版출판금지요구시위 [AP연합 2006-04-12 20:12]

    Muslim protesters burn an edition of Indonesian version of Playboy magazine during a demonstration in Bandung, West Java, Indonesia, Wednesday, April 12, 2006. Dozens of Muslims staged the protest demanding the magazine to be banned. (AP Photo)12일 인도네시아 서부 자바 반둥에서 수십명의 무슬림이 플레이보이지 인도네시아판의 출판금지요구시위중 플레이보이지 인도네시아판 한권을 불태우고있다(AP=연합뉴스)
  • 중고눈팅 2006/04/12 [15:34] 수정 | 삭제
  • 꼭 만화책같다. 진중권이 저 만화책을 많이 봤는지 모르겠다. 갸가 글 쓰는 수준이 꼭 만화책에 나오는 수준이던데...... 농담 끝.
  • 2006/04/12 [14:32] 수정 | 삭제
  • 이규태가 틀린 말은 한 개도 안했는데 진중권은 웬 사이코 짓? 자기 무식한 걸 왜 남한테 탓하고 억지 부리는 게 진중권의 정신병.



    '복수에 민감하고 호전적인 두 부족'간의 보복테러, 이규태는 정확하게 말했네. 다른 나라도 아니고 같은 민족끼리도 이렇게 서로 못죽여서 안달이라니...한국에도 종교끼리 싸우는 일이 있어도 저렇게 까진 안한다. 아무래도 부시는 벌집을 건드렸다.



    이라크 시아파 사원 폭탄 공격 240명 사상

    [YTN 2006-04-08 15:12]

    [앵커 멘트]
    이라크 바그다드의 한 시아파 사원이 자살 폭탄 공격을 받아 24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시아파와 수니파의 종파간 갈등이 점점 극한 양상을 띄고 있어 내란의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김잔디 기자의 보도입니다.



    [리포트]

    구급차의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이슬람 사원 외곽이 아수라장으로 변했습니다.

    시신들이 계속해서 실려나오는 가운데 생존자들은 충격으로 울부짖습니다.

    건물 외벽이 무너져 내렸고 사원 여기 저기에 타고 남은 잔해만 널려 있습니다.

    이라크 바그다드 북부의 바라사 시아파 사원에서 세차례의 자살폭탄 테러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고로 79명이 숨지고 160여명이 다쳤습니다.



    [녹취:목격자] "먼저 사원의 왼쪽 여성용 입구가 폭발했고, 사원 안쪽에서 또 폭발이 있었습니다."

    이번 폭탄 테러는 금요예배를 마친 신도들이 사원을 떠나는 순간 일어나 피해가 더 컸습니다.

    이라크 경찰은 3명의 자살폭탄테러범들이 전통적인 시아파 여성 옷차림으로 위장했다고 밝혔습니다.

    이번 테러는 지난 2월 시아파 최대 성지인 황금돔 사원 테러 이후 가장 큰 규모입니다.

    수니파와 시아파간 보복 테러가 이어지면서 이라크가 사실상 내란으로 치닫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습니다.

    YTN 김잔디[jandi@ytn.co.kr]입니다.


    [로이터포토 2006.03.27 10:03:40]





    잡지 하나로 엉망 된 인도네시아

    印尼,플레이보이로 시끌…무장회교단체 “무력동원 소탕” 경고





    미국의 유명한 성인잡지 ‘플레이보이’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무슬림 인구를 자랑하는 인도네시아에 상륙하면서 인도네시아 전역이 시끌시끌하다.


    7일 로이터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플레이보이 첫판이 인도네시아에서 발행되자 일반인들 사이에서 선풍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한 무슬림 무장단체는 플레이보이 ‘소탕’을 위해 무력을 동원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고 나섰다.


    인도네시아에서 최초로 발행된 플레이보이 화보들은 50년 전 미국에서 발행되었던 것들보다도 못한 수준. 여성들과의 인터뷰, 심층기사 및 칼라사진들이 들어있지만 가슴이 노출된 사진은 한 장도 없고 완전 누드에 가까운 사진이 덜렁 한 장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사본들이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 사무실들을 도배질하고 있고 잡지를 구하려는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면서 신문과 방송들이 마침내 국가적 이슈로 다루고 있다고 로이터통신은 보도했다.


    이같이 전국적 이슈로 떠오르자 이슬람 무장단체의 한 지도자는 플레이보이 잡지를 ‘소탕’하기 위해 필요하다면 '무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 2006/04/12 [14:21] 수정 | 삭제
  • 펄벅여사와 이규태 사진--소록도 취재한 이규태 기자



    http://blog.naver.com/rimid2002/80023249517

    한국인에게 한국을 깨우쳐준 '천생 기자'
    25일 별세한 '기자 이규태'의 삶



    ▲ 펄 벅과 함께. 1960년 한국을 방문한 '대지'의 작가 펄 벅 여사와 그를 취재하던 젊은 날의 이규태 기자가 경주 첨성대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당시 펄 벅 여사의 말에 감명받은 이규태 기자는 '한국학' 탐구에 눈떴다. 조선일보 DB

    3년차 신참기자 이규태가 1961년 소록도를 취재했다. 한센병 환자들에게 붙잡혀 닦달을 당하고도 이규태는 바다를 메워 ‘천국’을 만들겠다던 그들의 ‘눈물’을 기사에 담아냈다. 작가 이청준이 그 기사를 바탕으로 쓴 것이 ‘당신들의 천국’이다. 작품 속 기자 ‘이정태’의 모델도 이규태다. 훗날 이청준은 말했다. “그는 내 소설의 주인공이었지만 이제 나는 그의 독자다.”


    ‘개화백경’에서 시작한 우리 것에 대한 탐구…



    쉼없이 계속된 ‘38년 大항해’… 死神앞에서도 붓꺾기 싫었다



    사실 이 땅에서 이규태의 독자보다 독자 아닌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1988년 몸을 의탁하던 백담사 궁벽한 객사(客舍) 방을 TV가 비춘 적이 있다. 생활편의품 하나 없이 썰렁한 방에 책 ‘한국인의 의식구조’가 놓여 있었다. 물러난 권력자가 황망하게 서울을 뜨면서 챙겨 온 것이 이규태의 책이었다.

    이규태는 기자가 노력하면 무엇을 어디까지 할 수 있는가를 보여준 기자였다. 조선일보에서 45년을 근속했고 퇴직한 뒤로도 2년을 독자와 함께 했다. 그가 연재한 대형 시리즈만 37개를 헤아린다. 1968년 60회를 이어간 첫 연재 ‘개화백경(開化百景)’부터가 한국 신문사상 가장 긴 전면(全面) 시리즈다.



    ▲ '한국학 벙커' 서재. 1만5000여권의 책과 노트, 스크랩 등 자료들로 가득 채워진 자신의 서재에서 집필에 몰두하던 이규태 전 조선일보 논설고문. 조선일보DB

    1975년부터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연재하면서 그의 우리 것 찾기는 일대 현상을 불렀다. 대학에선 토론대상, 기업에선 연수교재, 군에선 교육자료가 됐다. 8권으로 묶은 베스트셀러 ‘한국인의 의식구조’는 지금도 꾸준히 팔린다. 그는 120권에 이르는 저서를 낸 왕성한 저술가이기도 했다. 1983년 출발해 23년을 달려온 ‘이규태 코너’는 새삼 말할 것도 없다.



    이규태는 한국인에게 한국인이 누구인가를 깨우쳐준 기자였다. 그 평생작업에 눈 뜬 계기가 작가 펄 벅과의 만남이었다. 1960년 방한한 펄 벅은 농부가 볏단 실은 소달구지를 끌면서 지게에 볏단을 지고 가는 모습에 감탄했다. “농부도 지게도 달구지에 오르면 될 텐데 소의 짐을 덜어주려는 저 마음이 내가 한국에서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규태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던 풍경에 펄 벅이 감동하는 것을 보고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실마리를 잡았다. 왜 우리 음식엔 물이 많은지, 갓은 왜 비도 새고 바람도 새는지, 우리는 사촌이 땅을 사면 왜 가슴이 아니고 배가 아픈지. 의문이 끝없이 일었다. 우리 것의 원형을 찾는 대장정(大長程)이 시작됐다.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이었다.



    이규태는 널리 보고 오래 기억하는 마지막 박람강기형(博覽强記型) 기자였다. 다들 인터넷에 널린 남의 것 골라다 쓰는 세상에 스스로의 눈과 귀로 지식의 곳간을 채웠다. 책 1만5000권이 메운 집 지하실은 ‘한국학 벙커’였다. 동서고금을 종횡무진한 필법의 원천이었다. 책마다 책장이 접혀 있거나 밑줄 긋고 메모한 흔적이 책과 주인의 수십 년 대화를 말했다. 그나마 멀쩡한 책들이 그렇고, 훨씬 더 많은 책이 분해되고 오려져 파일에 담겼다. 그가 시행착오 끝에 나름대로 창안한 분류법으로 만든 색인이 10만개를 넘는다.



    이규태는 이름이 ‘한국학’ 앞에 붙어 불렸던 기자였다. 그는 근래 부쩍 “저 비싼 책, 희귀한 자료들을 누군가 활용하면 좋을 텐데” 되뇌곤 했다. “대학처럼 함께 공부하는 선후배들이 있었다면 참 할 일이 많은 분야인데 혼자 힘으론 한계를 절감한다”고 했다. 그는 아사히신문 논설위원 출신으로 일본 민속학을 개척한 야나기다 구니오(柳田國男) 이야기도 자주 했다. 야나기다가 채집한 방대한 자료를 후세가 정리해 체계를 세우는 ‘야나기다학(學)’이 생겼듯 ‘이규태학’도 곧 나올 것이다.



    이규태는 겉은 질박하고 속은 따스한 기자였다. 전북 장수의 외진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 종이를 처음 보고 너무 신기해서 그걸 접어놓고 자다가도 펴보곤 했다”고 말했다. 어렵게 자란 만큼 그는 평생 검약하게 살았다. 집 변기 물통에 벽돌을 넣어 물을 아꼈고 점심은 몇 천원짜리만 먹었다. 그러나 뜻 맞는 후배들과는 곧잘 낙지집, 선술집에서 소주 자리를 벌였다. 맨날 그 양복이 그 양복이었어도 후배 전세금은 선뜻 빌려주곤 했다.

    그는 이발소에 가지 않고 주례 서지 않고 TV에 나가지 않는 ‘삼불(三不)’을 지켰다. “생긴 것이 둔하고 말주변 없어서”였다. 수십 년 고정 칼럼을 이어온 피 말리는 행군은 그 굼뜬 듯한 무던함, 진중한 참을성, 질박한 성품이 있어서 가능했다.



    이규태는 자기를 알아보고 배려해 준 윗사람에게 글로 보답한 기자였다. ‘이규태 한국학’의 출발점 ‘개화백경’과 세계 언론사에 남을 ‘이규태 코너’ 연재를 그에게 권한 이가 당시 사장이던 방우영 명예회장이다. 방 명예회장은 ‘이규태 코너’라는 칼럼명도 지어줬다. 일본에 가면 헌책방에 들러 이규태가 반길 유익한 책을 두어 권씩 사다 주기를 낙으로 삼았다. 방상훈 사장도 그의 글을 하늘이 끝낼 때까지 쓸 수 있게 배려했다. 그는 소주 자리에서 두 경영자에 대한 고마움을 말하곤 했다.



    그는 병상에서 이미 열흘 전에 ‘이규태 코너’를 접는 고별 원고를 기자 아들에게 구술해 놓고도 매번 “이제 신문에 실으라고 할까요”라는 아들의 여쭘에 답을 하지 않았다. 사신(死神)을 앞에 두고도 끝내 붓을 꺾기가 싫었던 것이다. 이규태, 그는 천생 기자였다


  • 무위 2006/04/10 [00:07] 수정 | 삭제
  • 구미호 관련한 글의 원제목이 으로 제목이 좀 어렵죠? 월간지 에 연재된 글입니다. 진보누리 게시판에도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 글은 위의 원문보다 훨씬 오래 전에 생각해 왔던 주제였습니다. 약 15년~ 20년 전에 요재지이에 나온 이야기를 보고서 그런 주제를 생각했습니다만.....여태껏 글로 만들지 않고고 있다가 막상 쓰려고 하니까 또 하루만에 써지더군요. 시작이 반이란 말이 사실인가 봅니다. 아니면 너무나 오랫동안 머리 속에서 푹 곰삭아 있던 주제라서......

    여기 피투성이 님의 블로그로 한번 가 보시길.....
    피투성이님의 아이디는 좀 과격하게 표현되었지만 옛날 살생부 파문으로 매우 유명하신 논객입니다.
    http://blog.naver.com/s14600?Redirect=Log&logNo=19746919

    감사드립니다.^^

  • 김휘영팬 2006/04/09 [21:58] 수정 | 삭제
  • 김휘영 글 연구 동아리입니다.
    인물과 사상 1월호에서 첨 김휘영 글을 보고 친구가 가져 왔던데 그 글의 원문은 어디서 찾을 수 있죠?
    구미호 전설과 포송령의 요재지이 이야기는 우리 동아리에서 뽑은 좋은 글에 선정됐는데......참 특이하더군요.
    곧 김휘영 까페를 하나 만들거로 했어요. 아마 제가 쥔장 하게 될 것.
    잘 치장하고 나면 소개할께요.
    특히 문화관련 이야기 많이 저술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