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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 반대하고 싶으면 여성 인권보장부터 하라
[신정모라의 여성주의] 여성 낙태권 입장에서 본 종교 모순 비판
 
신정모라   기사입력  2006/03/22 [06:34]
낙태금지는 왜 여성에게 설득력이 없을까?

도의 최고의 경지는 자연인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 말의 뜻은, 인간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평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라는 뜻이다.

(살아 있는 동안 리듬을 타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단순 생리 현상에서 시작하여 고도의 깊은 감각까지 변화가 많은데, 단순한 생리 현상은 점수를 낮게 주고 정신이 고도의 신비스런 경지에 이르면 높은 점수를 주는 기존의 종교문화는 우리의 편견을 부채질한다.)

기성 종교들은 순전히 남성 중심으로 되어 있다. 예수, 공자, 석가 등, 남자가 만든 종교가 여성을 멀리 하는 이치는 이렇다. 이들 종교의 창시자들은 남자의 특성을 지녔다기 보다는 중성에 가깝다.

그래서 단순생리 현상은 종교적 관점에서 저급하고 열등한 정신 상태로 보인다. 고로 남성종교환경에서 여성은 남성이란 인간을 대표하는 존재들의 생리적 상대로서 저급한 위치로 떨어진다. 이것은 인위적 문화가 만들어낸 편견이다. 남자가 주인공인 종교에서 여성은 생리적 감각의 일차적 대상이 되기 때문에 종교인들이 가까이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여자를 제자로 삼지 않았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다.

예를 들어 컴퓨터를 전공하는 사람이 동물학박사를 자기보다 컴퓨터를 모른다고 멸시하는 현상과 비슷하다. 그러나 우리는 컴퓨터 박사와 동물학 박사가 서로 전공이 다르니까 비교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사람의 단계적 정신발달 과정도 각자의 고유의 경지와 특성이 모두 소중하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중성보다는 남자가 다음 세대를 이어가게 한다. 세상에 중성만 있으면 아이들이 탄생할 수 없다. 성자를 숭배하기 위해 자연인의 정신 상태를 멸시하는 종교문화를 편견이라고 봐야 한다.

오랜 역사를 가진 모든 종교는 여자를 인간 속에 편입시키지 않고 있다. 여자의 입장에서는 남자가 성적 대상이 되기 때문에 종교적으로 남자란 저급하고 열등하고 동물적인 감각을 불러일으킨다고 느껴진다.

그러므로 여자가 종교를 창시했다면 남자를 제자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피장파장이다. 남성 종교가 창시될 당시 여자는 사람 축에도 못 들어갔고 노예 축에도 끼지 못하는 정도였다. 그런 시대에 창시된 종교가 여성차별을 전통적으로 유지하여 왔다.

종교가 가진 이런 성적 편견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종교의 절대적 믿음이란 특성 때문에 수정되지 못하고 있어 여성은 민주사회에서도 종교문화란 성차별 사상에 무의식적으로 희생당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쪽 성만을 사람으로 간주하고 창시된 종교는 한쪽 날개 없는 새꼴이다. 인간 속에 여자, 남자가 있다. 이것을 뒤늦게 깨달은 종교들이 여성 사제직, 또 여성 목사직을 인정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여성사제직을 인정하고 있지 않는 독단적인 종교도 있다. 자기들이 정한 교리가 신의 말이라고 주장하며 신이 침묵한다는 이치를 교묘히 이용한다.

낙태금지의 논리는 성차별의 절정을 이루며 인간 도덕과 위선의 표본을 훈장처럼 달고 있다. 낙태 반대의 논리는 양의 탈을 쓴 늑대인데, 그 늑대가 눈이 멀어 자신의 늑대꼬리가 사람들 눈에 띈다는 것도 모른다.

반대론자들은 실은 여성 차별을 앞장서서 자행하고 있다. 이들은 인구 폭발로 굶주리는 지구촌 인간들에 대해 무책임하다. 이들은 피임까지도 반대하며 인구폭발 문제에 대해선 무관심하다. 인구가 늘어 문제가 발생해도 신이 알아서 먹여 준다고 한다.

신이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이들은 이처럼 악용하고 있다. 절대자가 뭐가 아쉬워 인간을 먹여 살리려고 지구상에 돌아다니겠는가?

실지로 아프리카에서는 아이들이 기아에 허덕이며 죽어가고 있다. 실지로 태어난 아이의 반이 굶주림으로 죽는다고 한다. 교황청은 세계여성대회나 유엔의 인구정책 국제 모임에 낙태금지의사를 표명하기 위해 대표단을 파견하는 등 열성을 보인다.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영혼을 위해 이들은 아낌없는 막대한 예산을 투자한다. 그러나 실지로 엄마의 몸밖으로 나온 살아 있는 아이가 죽어 가는 아프리카에는 대표단을 파견하는 열성도, 대대적인 홍보도, 막대한 예산도 투자하지 않는다.

이들은 살아서 태어난 생명이 죽어 가는 상황에 대해서는 생명의 소중함을 말하지 않는다. 태어난 생명의 죽음에 대해선 방관하고 태어나지도 않은 태아를 위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생명의 소중함을 역설한다. 전쟁에서 사람이 죽어 가는 점에 대해서도 교황청은 낙태반대처럼 대대적인 데모를 하지는 않는다.

살아 있는 생명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영혼이다. 태아가 세례도 받지 못하고 죽으면 그 영혼이 천당에 가지 못하지만, 태어난 아이는 이미 세례를 받았으므로 죽어도 영혼이 천당으로 들어가니 괜찮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들의 교리는 생명 존중이 아니라 천당가기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믿음을 위해서 낙태반대를 외치는 것이지 생명을 소중하게 여겨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마치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등장하는 종교적 믿음을 위해 살인도 하는 노인처럼 생명 존중이 아니라 종교적 믿음을 위해 인간세상의 가치관을 교리에 좌우되게 하려는 종교적 독선이다. 그런 게 교리라면 생명 앞에선 독을 지닌 꽃뱀과 같다.

종교적 믿음을 위한 독선은 미국에서 낙태한 의사를 살해하는 사건을 불러일으키는가 하면, 또 낙태한 의사에게 유죄판결을 내리는데 열성을 올리고 있다. 교황청이 진정 원하는 것이 자기들의 가르침을 지키기 위한 교권지키기임을 깨닫게 한다.

그 편견과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이들은 예수를 팔아먹고 있다. 교권이 인간을 차별하면서까지 지켜야 할 만큼 소중한가 의문이다. 종교를 위해 인간이 존재하나, 인간을 위해 종교가 탄생했나! 이들은 다시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최근 한국 정부(보건복지부)는 낙태를 금한다며 허용하자는 의료협회와 충돌했다.(1996년 당시) 이 정부의 배경에는 권력을 먹여 살리는 종교계의 파워(여성신도들에게 노예적인 순종을 맹세하게 하고 긁어모은 돈. 이 늑대들은 늑대 꼬리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가 든든한 후원자로 자리하고 있다.

종교권력에 잘못 보이면 정치권도 무너진다. 그러니 종교 파워가 막강한 현실에서 여성차별이 쉽게 개혁되기 어렵다. 아랍권에만 종교파워가 센 게 아니다.

인간 차별과 성차별을 가르친 성자는 없었다. 예수 탄생의 의미가 사랑의 전파라면 기성 종교는 스스로의 과오를 인정해야 한다. 남성 종교는 인간 파괴적이었다.

낙태 반대하며 피임 반대하는 종교들은 돈만 신도들로부터 긁어모으지 말고 인구 폭발로 굶주리는 지역을 먼저 책임지고 나서 낙태 반대를 해야 설득력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알면서도 모른 체 하는 철면피 두터운 얼굴가죽을 이제 성형수술해야 하지 않을까.

굶주리는 사람을 책임지지 않는 종교는 피임금지를 말할 자격이 없다. 인구 폭발은 책임지지도 않고 낙태를 반대하고 피임을 반대한다. 만약 피임·낙태를 하지 않았다면 현재 지구상은 전쟁과 기아에 허덕이는 지역이 더욱 확대되었을 것이다.

한정된 식량으로 지구상 인구가 먹고살아야 하므로. 살아 태어난 사람들을 기아나 전쟁으로 죽이겠다는 건지? 살아 태어난 사람들이 태아보다 소중하지 않다고 누가 단언하는가.

실지로 한국의 사제들은 신도들에게 피임을 하는 것은 인륜에 어긋난다고 가르쳐서 신자 중에는 아이를 다섯까지 두고 나서 피임을 한 부부도 있다. 그럼 여섯 번째 피임은 인륜에 어긋나지 않은가 이런 의문이 남는다.

어쨌든 끝없이 아이를 출산할 수는 없어서 종교의 영향권 내의 신도들도 결국 모두 피임하게 된다. 그렇다면 부부는 누구나 피임한다는 소리이다. 신자들이 출산한 아이들을 자기들이 먹여 살리는 것도 아니다.

부모가 형편이 어려워 아이를 버리거나 고아원에 맡기거나 아니면 아이 수술비를 댈 수가 없어 아이가 죽어 가는 실제 상황에 대해서는 이들은 열을 올리며 낙태금지 하듯이 데모를 하지 않는다. 아이는 부모에게 맡겨진다.

부모가 형편이 어려워 낙태를 할 수 밖에 없거나 미성년자가 임신하여 낙태를 할 수 밖에 없는 형편, 강간당한 여자가 낙태할 수 밖에 없는 경우에 처해도 종교는 낙태를 금지한다.

그리고 낙태를 안하고 탄생한 아이가 고아원에 버려지고 어려운 형편에 제대로 먹지 못하고 부모의 폭력에 가끔씩 죽어 가는데도 이런 문제는 그렇게 열렬히 떠들지도 않고 침묵한다.

신의 침묵을 흉내내며. 낙태를 금지했으면 이런 문제를 우선적으로 책임져야 금지가 설득력을 가지는 데도 말이다.

그러니까 살아 태어난 생명이 어려운 형편에 죽어가도 이들은 부모의 책임으로 돌린다. 그래 놓고 태어나지도 않은 태아는 자기들에게 속한 것 마냥 국제적인 데모까지 하며 신도들로부터 긁어모은 돈을 국제대회 보이코트 하느라 써버린다.

고아원이나 죽어 가는 아프리카 어린이에게 보내는 대신에. 그리고 이들은 해마다 여성사제직을 인정하라는 신도들의 주장을 막기 위해 기괴한 논리를 창조해 내느라 정신적, 물질적인 소모와 투자를 한다.

이들은 결국 여자를 해방시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그리고 피임하지 않는 부부는 없으므로 이들의 가르침은 결국 신도부부들에게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죄책감을 이용해서 원죄논리를 부각시키는 것이다. 신도들을 종교적으로 얽어맨다.

권위와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화석이 된 교리나 떠들고 건물이나 짓는 것이 종교의 역할이라면 더 이상 설득력을 잃었다.

낙태 반대하고 싶으면 여성의 인권 보장부터 주장해야 여성들에게 설득력을 가진다. 이렇게 하기는커녕 이들은 여성사제직을 금지하면서 성차별을 한다. 그 변명으로 성차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 구분을 한다고 단어 하나 바꿔 놓는다.

어찌 신을 인류에게 이토록 오랫동안 팔아 교권을 유지하며 인류의 눈물, 특히 여성의 눈물을 강요하고 여성의 노동력과 헌신과 희생을 정당화한단 말인가?

종교내의 신도들의 숫자를 보면 여자가 90%이다. 그만큼 그들은 불행하기 때문에 신에게 의지하고 싶어하는데, 그들의 불행을 언급하면서 "낙태 금지"를 주장했던가?

그 곳엔 신이 없다. 종교 기득권 권력이 꽃뱀처럼 신에게 의지하고자 하는 소외된 여성들의 절망감을 교묘히 종교세력(교리)유지에 이용하는 것이다. 신도들이 그걸 전혀 모르는 바가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정의실현 신도단체가 속속 활동을 개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언젠가는 신의 침묵이 의미 있어지리라 희망하면서.

이들은 "여성의 인권"을 주장한 적이 없었다. 이들 눈에는 여자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여성의 불행은 눈에 들어오지 않고 그들의 희생만 강요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믿나 보다.

그렇게 억지부린 대가로 비교적 인권이 보장되는 선진국 교회들이 텅텅 비어가고 있다. 신은 인간을 차별하지 않기 때문에.

왜 여자들만 낙태를 하지 않기 위해서 사회적으로 죽어야 하는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서 사회적으로 죽는다는 것은 노예가 된다는 의미이다.

즉 여성해방을 종교는 반대하고 있다. 단지, 종교와 문화를 차지하고 있는 주체들이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남성이 만든 종교의 교리를 수천 년 동안 개혁하지 않고 신주단지 모시듯 지켜오고 있다.

피비린내 나는 이단자 처벌과 마녀사냥, 종교 전쟁들을 치르면서 오늘날까지. 남자가 만든 선을 강요하는데, 인류가 귀담아 들을 것 같은가?

현실적으로 낙태를 법으로 금지하면 숨어서 자격증도 없는 의사가 낙태를 행해서 모체의 생명이 위협받는다고 한다. 낙태한 여자의 대부분이 결혼한 여자라는 걸 감안할 때 낙태는 금지한다고 막을 수 없다.

종교는 좋은 일을 많이 하면서, 예를 들어 환경 운동, 불우이웃 돕기, 사랑 베풀기 등등. 그런데 유독 여자들에 대한 차별 대우만은 시정하지 않고 있다.

여자들이 자각하면 남성종교는 무너지게 되므로 그래서 교권을 지키기 위해 여자의 삶을 희생물로 삼아 제사상에 제물로 바치고 있는 걸까.

종교 내에서 이들은 여성의 불행을 무수히 접하면서도 귀 막고 눈 막고 살아왔다. 이들은 군사독재치하에서도 군사독재에 항거하라는 말은 하면서 가정폭력과 가정 독재를 여성신도들로부터 적나라하게 고백 받아 알고 있으면서 여성들에게는 남편에게 복종하고 순종하라고 가르친다.

군사독재는 악이고 가정내의 폭력과 독재는 악이 아니라고 종교인들은 생각하나? 참으로 편리한 남자위주 사고방식이다.

사실 가정 폭력이 군사독재의 폭력보다 심각하다. 이들이 이걸 몰라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 눈에는 독재치하에서 억압당하는 남자는 보이지만 남자에게 구타당하고 억압당하는 여자는 보이지 않나?

이들의 교리가 이들에게 이런 최면을 걸었을까? 여성들은 현실적으로 사회적 죽음이냐 낙태(죄의식을 동반한)냐의 기로에서 선택권을 가지지 못한다. 진정 낙태가 죄악이라고 하고 싶으면 여성도 동등한 인간임을 먼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여자들은 이해할 수가 있다.

낙태금지론자들은 실제로 임산부가 태아 때문에 생명이 위급해도 낙태해선 안 된다고 한다. 태아와 임산부 두 생명을 비교해서 태아를 희생시킬 수 없다는 논리이다.

이 논리는 사실적으로는 태아를 살리기 위해 임산부를 죽여야 한다는 것과 같다. 수술해서 낙태하지 않으면 임산부가 죽게 된다는 것을 이들도 알고 있으므로. 이들은 자신의 교리, 영혼이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는 환상적 믿음을 위해 살아 있는 임산부의 생명을 포기하고 있다. 임산부는 세례를 받았으므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은 낙태할 필요도 피임할 필요도 없는 독신의 지위에 있으면서 피임과 낙태를 반대하는 태도는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피임과 낙태에서 전혀 위험성도 책임도 없는 사람이 남의 인생에 콩내놔라 팥내놔라 말하는 일은 식은 죽먹기이다.

피임과 낙태를 금지하기 이전에 여자는 선택권이 없는 삶에서 고통받고 있다는 현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솔직히 "낙태"는 여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사회가 구조적으로 성차별이란 기준으로 하고 있다. 남자가 지배하는 남아조네스 사회에서 여성들에겐 선택권이 없다.

남자들에게 만약 사회적으로 죽으라 하면 가능하겠나? 여자들도 똑같은 인간이다. 더구나 결혼한 여자 낙태 안 해본 여자가 없을 정도인데, 그 비율 중 상당히 높은 것은 아들 낳으려고 딸 낙태하는 것이다. 성차별이 낙태를 자초한다.

예수 그리스도 시절이나 지금이나 얼마나 많은 여자들의 불행을 담보로 마음의 평화를 준답시고 순종을 가르쳐 왔던가. 그 마음의 평화가 바로 여성의 삶을 노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즉 개혁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미끼란 걸 여성들은 깨달았다.

바로 여성들에게 가르치는 사랑이라는 실체가 결국 여성의 수 천년 동안의 노예 생활을 정당화했던 죄의 근원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단점 없는 "선"이란 없다는 것을 인류는 자각하게 된다. 선과 악은 결국 하나의 실체이다.

그러니까 성 차별하는 종교는 사랑과 자비를 운운할 자격이 없다. 사랑은 인간 차별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니.

그리고 반항하는 여자가 많이 나오기 시작하자, 이들은 여성차별이 아니라 성 역할에 따른 성 구분이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 구분의 기준은 이들 남자가 정한다.

성 구분은 바로 남자가 일방적으로 여자의 동의 없이 정한 것이니 성차별이 될 수 밖에 없다. 여자들의 반항을 막기 위해 성 구분이란 말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성차별이다.

어려운 인생 문제를 당사자인 여성을 소외한 채, 당사자도 아니고 사회의 특권이란 특권은 독차지하고 여성을 노예로 착취해 왔던 남자가 결정해 놓고 여자들에게 자기들의 일방적인 선을 설교한다. 인간의 자율성보다는 순종, 복종을 요구하는 종교의 본성은 심각하게 심판 받아야 할 위기에 처한 지 오래되었다.

여자들에게 더 이상의 희생과 헌신과 인내를 강요할 수는 없다. 이제 여자들은 지쳤다. 여자만 소외되는 민주주의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남자는 여성의 임신, 출산, 양육, 낙태에 대해서 여성들 스스로 민주적인 '선'을 창출해 낼 때까지 남자의 일방적 특권으로 신처럼 명령할 자격이 없다.

남자는 정자 하나 흘렸지만, 여자는 10달 동안 임신해서, 양육한다. 아이 문제에 대해선 일단 여자들이 일차적 권한이 있다. 육체자체로 일차적인 책임을 지고 있으므로. 미혼모는 있는데 미혼부라는 단어조차 없는 현실이 그 근거이다.

여자들이 낙태하는 것이 쉬운 일인 줄 아나? 남성사회에서 선택권이 없는 여자들은 임신, 출산, 양육, 그리고 자아 실현이란 과제까지 온갖 고통과 갈등과 죄책감과 차별인식 속에서 시달린다. 남자는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남자가 만든 일방적인 종교가 보호해 주고 있으니).

낙태는 살인이니 해 가면서 무슨 정의의 사도나 된 듯이 위선 떨 것까진 없다. 여자에게 이런 역할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남자들이 조작한 신은 이미 신이 아니다. 절대자인 신을 인간이 만들어낸 졸렬한 교리로 파악하려 한다는 것이야말로 신에 대한 교만이다.

그렇다고 종교 신자나 사제들이 나쁜 사람들이란 뜻은 아니다. 문제는 이들이 믿고 있는 교리에 있는 것이지 사람들 개개인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신자들은 잘못된 종교 교리와 제도를 개혁하기 위해서 노력을 많이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맨꼭대기 권력층의 보수 세력이 문제이다. 종교의 보수성과 독재성은 지구상 어느 독재권력보다 지독하고 악랄하다.

개인적으로 내가 만난 신자들과 사제들은 보다 성실하고 진실된 사람들이 많았다고 기억된다. 나의 주장이 그들에게 상처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니까 문제는 사람들이 아니라 보수적인 교리이다. 인간이 종교를 위해 존재하나 종교가 인간을 위해 존재하나? 당연히 종교는 인간을 위해 개혁되어야만 한다.

 
* 페미니즘 저서, '공자를 울린 여자' (1997)에 실려 있는 글입니다.  - 필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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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6/03/22 [06:34]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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