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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의 진통으로 반 밖에 못본 아리랑 공연
[통일동이 평양출산기1] 7년만에 다시찾은 평양, 아기와 함께한 15박16일
 
황선   기사입력  2005/11/05 [12:09]
우여곡절 끝에 평양시 참관을 결정하고 시부모님과 동행하기로 했다. 출발하기 전날 통 잠들지 못하는 어머니를 두고 세 시간 남짓 잠을 청했다. 특별히 잠이 오진 않았지만 밤까지 세면 배 속 아이가 너무 무리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가장 낭패스러운 상황은 출발 직전에 진통이 시작되는 것이다.

정말 평양에서 아이를 낳게 될 줄은 몰랐으나 모처럼 갖게 된 평양시 참관이며 아리랑 공연을 눈앞에서 놓쳐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은 굴뚝같았다. 그 후에야 진통이 시작되든 말든, 그게 서울이건 평양이건 당시의 나로선 크게 문제되지 않았다.

▲ 지난 10월10일 황선씨 가족이 인천공항에서 평양행을 기다리고 있다가 기념사진을 찍었다.     © 자주민보 제공

'자주민보'의 준영언니와 종출이 형 부부가 새벽같이 나서서 우리 일행을 편안히 인천공항까지 배웅해 주었다. 새벽 차 속이나 비행기 안에서도 장백이(둘째 아이의 태명)의 강력한 발길질과 배 뭉침이 꽤 이어졌지만 출산의 기미로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다.

작년 절개수술 부위의 통증은 이미 오래 되어서 원래 그렇거니 생각하며 몸을 움직였다. 늘 엄살이 심한 편임에도 좀 크게 아프다 싶은 것, 정말 두려운 순간에는 비정상적으로 무뎌지고 용기 백배해지는 이상징후가 두 번의 출산 때 다 나타난 것이다.

민이(첫째 아이) 때도 사람들이 나의 멀쩡한 모습을 보면서 "더 아파야 된다. 아직 멀었다. "고 생각했다고 했는데 이미 그때 아이는 가사상태에 빠져들고 있었다. 하여간 이번에도 자궁파열의 고통을 무식하게도 참고 다닌 모양이다. 
 
배 뭉침으로 약간 비스듬히 앉아 비행을 했다. 난생처음 비행기를 타시고 다소 흥분해 계신 시부모님을 뵈니 마음이 유쾌했다. 우리 부부 모두 양가 부모님께 무엇 하나 해드리기 보다 여전히 초보적인 생활까지 의지하고 있는 처지라 이번 여행을 반강제로 추진하면서 부모님의 불편한 마음은 아랑곳없이 자족해하며 기뻐했다.

몇 달 모은 강연비며 용돈을 털어 회비를 만들고 민족통일 노길남 선생님께서 민이 돌 선물로 주신 100달러를 모아 '우리가 부모님 여행을 다 보내드리다니…'하며 뿌듯해했다.

비행기에 함께 탑승한 파리 한 마리를 보고 어머니께서 "남한 파리가 평양가네" 하시자 이내 아버님께서 "남측 파리가 북측에 간다라고 해야지"하며 시정하시는 모습도 정답고 특히 순안공항 활주로에 내려서기 직전 이북 농촌 풍경을 보시며 "소박하게 살림을 잘 꾸려놓았네"하고 어머님께서 조용히 말씀하실 때는 이번 여행이 기대보다도 훨씬 좋을 것임을 예감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어떻게 단박에 그걸 포착하셨을까?

비행기 문을 나서며 번호와 이름, 얼굴 대조가 있었다. 7년 만에 딛는 평양 순안공항이다. 98년에는 5개국을 거쳐 베이징에서 고려항공편으로 순안공항에 들어왔었다. 꿈인 양 비행기에서 내리고 꽃다발을 받고 도착성명을 발표했었다. 그래서 그런지 순안공항이 새삼스러웠다. 처음 와보는 듯한 낯설음을 깨운 건 역시 사람이다. 비행기 문에서 신분확인을 하던 분이 내 목에 걸린 이름만 보고는 "오시느라 고생 많았습니다. 밖에 영희 동무랑 기다리고 있습니다"하며 반갑게 인사했다.

공항 세관을 통과하자마자 영희 언니가 반갑게 부르는 소리가 났다. 분홍색 투피스를 예쁘게 입은 언니는 7년 전처럼 그곳에서 나를 반기고 있었다. 그리고 지난 5월 금강산에서 만났던 낯이 익은 분들도 계셨다. 시부모님께서도 북녘의 일꾼들이 아들의 안부를 물어주자 마음이 더욱 편해진 듯 보였다. 
 
그리운 양각도 호텔에 도착해 여장을 풀고 동명왕릉 답사에 나섰다. 도중에 서울의 내 책상 위에 모형으로 있는 3대헌장기념탑을 지났다. 사진으로 보던 것보다 더 수려하고 매끈한 모양이었다.

동명왕릉에 도착하니 우리 7조에게 유적설명을 해주시는 분이 운 좋게도 98년 남북해외청년학생유적답사단을 맡았던 바로 그 분이다. 어쩌면 외모며 또랑또랑한 목소리, 맛깔스런 말재간까지 하나 변함이 없었다. 도중에 몇 번이나 눈을 마주치고도 인사 나눌 시간이 없다가 다 끝나고 차에 오르기 직전에야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야, 이거 인사 나눌 시간도 없을 줄 알았습니다. 다시 오시니 너무 좋습니다."

워낙 역사와 한문을 좋아하시는 아버님께선 동명왕릉 이곳저곳을 홍길동처럼 다니시며 비문도 보고 나무도 보고 사진도 여러 차례 찍으셨다. 짧은 시간 설명을 들으셨음에도 남과 북의 역사관의 차이를 이내 아시겠다는 말씀을 하셨다. 아버님께서는 툭하면 당신께선 반공에 찌들었다는 표현을 쓰시곤 하셨지만, 이미 편견을 상당히 벗고 계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버님도 6·15 시대를 누리고 계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동명왕릉 참관을 만류했음에도 기를 쓰고 쫓아간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참관도중 꽤 심한 진통이 와서 몇 번 걸음을 늦췄는데 여성동맹에서 나오신 서옥선 어머니께서 보시곤 이내 재촉해서 만경대로 향하는 일행에서 빠져나와 평양산원으로 가게된 것이다.

산원일정은 이번 참관단에 내가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1일 오전 일정으로 이미 잡혀있었는데 내 상태를 짐작한 사람들이 급하게 산원으로 실어 간 것이다. 나는 평소보다 좀 더 아프긴 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었다. 북측의 재촉이 없었더라면 무슨 큰 일이 났을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일행에서 떨어져 산원에 도착하니 산원 원장선생님, 기술 부원장선생님, 과장선생님 등 휴식일 이었음에도 모두 나와 계셨다. "남쪽에서 10월17일 오전 9시에 수술예약을 해놓고 왔다"는 소리에 산원선생님들은 "이미 출산시기가 지난 것 같다. 빨리 수술을 해야 될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 10층짜리 건물로 79년에 지어진 평양산원  

초음파로 아이 크기와 위치를 확인하고 내진을 했는데 이미 피가 비치고 있었다. 제왕절개 수술로 아이를 낳은 후엔 적어도 2년 정도가 흐른 후에 다음 임신을 하고 이렇게 바로 임신이 이어진 경우에는 가능하면 유산을 권한다고 했다. 임신을 유지했다고 하더라도 예정일보다 열흘 이상 먼저 수술해야 안전한데 시간을 너무 끌었을 뿐만 아니라 몸도 무리했다고 성화를 하셨다.

선생님들의 흥분상태를 보건대, 저녁시간에 예정된 아리랑 공연을 불허하고 당장 수술을 시작할 것만 같았다. 나는 "아리랑 공연을 다 볼 때까지만 수술을 미뤄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선생님들은 "내진까지 해서 진통이 더 가속화될 수 있으며, 그 어떤 기적이 일어난 데도 오늘밤은 못 넘긴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그러나 나의 소원을 감안하여 진행을 좀 지연시키도록 대단히 아픈 지혈제를 놓고 원장선생님까지 떨쳐나서 구급차를 끌고 공연이 있는 5·1경기장으로 향하게 되었다.

시부모님께 설명을 드렸으나 구급차까지 따라 왔음에도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는 눈치셨다. 역시 나의 태연한 모습 때문인가. 아버님께선 "여기서 낳으면 오히려 잘 된 일"이라고 큰 소리로 웃으며 말씀하셨는데도 반쯤은 농담이셨는데 후에 내가 엉거주춤한 모습으로 의료진들에게 둘러싸여 산원으로 향할 때는 얼굴에 근심과 충격이 가득하셨다.
 
'아리랑'공연은 그야말로 굉장했다. 5·1경기장 가득 볼거리가 넘쳐 나서 사람의 한정된 시야로는 단 한번 참관으로 그것을 다 볼 수 없다는 것, 그것이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아쉬움이었다. 나는 98년 방북당시 김일성 경기장에서 집단체조를 이미 관람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인간이 창조할 수 있는 예술의 한계를 보았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리랑'은 또다시 그 한계를 뛰어넘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아리랑을 끝까지 볼 수 없었다. 남녘참관단이 가장 감동 깊게 보고 기억한다는 <통일장>은 커녕 반 정도를 간신히 보았을 뿐이다. 배 뭉침이 계속되는 통에 그토록 아름다운 공연에 온 정신을 집중하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틈틈이 곁의 어머님 아버님께 공연설명을 해드렸다. 아무래도 북의 역사를 다룬 부분은 설명이 필요하겠다 싶었다. 그러나 자세한 사건은 모르실 지라도 부모님께선 이미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 곡조가 흐르고 우리 민족의 일제 수난사를 표현한 그 장면에서부터 눈물을 흘리고 계셨다. 외세로 인해 우리 민족이 겪은 고통에 마음으로부터 공감하고 계신 것이다.

내가 시계를 들여다보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평양산원 원장님도 분주해지셨다. 고통을 구체적으로 호소하지 않았음에도 시계를 보는 것에서 이미 짐작을 하셨는지 "아홉시까지만 견뎌 보자"하며 앉았던 나를 끌고 나가실 기세였다.

막상 의료진들과 함께 좌석에서 일어서려 하니 어머님께서도 "좀 참았다가 서울 가서 낳자"며 불안해 하셨다. 아버님도 이내 따라나서시려는 걸 "여기는 남쪽처럼 가족들이 수술실 밖에서 내내 기다리고 간병하고 하지 않으니 공연 다 보시고 나중에 보러 오세요"하고 몇 번을 말씀드려도 안심하지 못하시는 눈치셨다. 어머님은 "아버님께서 그러다 아이라도 바뀌면 어쩌냐는 걱정도 하신다"고 하셨다.

차근히 설명드릴 수 없어서 안타까웠지만 한시가 급하다는 재촉에 부모님을 거의 반강제로  떼어놓다시피 하고 구급차 침대에 누웠다. 최대한 아이가 내려오지 않도록 누워야만 한다는 원장님의 지적이 있었다.

평양 시내를 요란하게 달려 드디어 산원에 도착했다. 5·1경기장에서 내가 시계를 들여다보던 그때 이미 분주하게 수술준비를 지시한터라 산원에 들어선 순간부터 모든 것은 일사천리로 착착 진행되었다. <계속>
 
 
* 지난 10월10일 평양 방문 중에 평양산원에서 출산한 황선씨가 산원에서 산후치료를 받으면서 쓴 글이다. 글은 평양도착에서부터  출산, 그리고 산후치료까지 평양산원의 의료실정과 북녘사람들의 정성을 경험한 그대로 적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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