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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필: 오빠부대 원조에서 국민가수로
[인물과 사상의 눈] 서구에 종속당한 대중음악을 역전시킨 작은 거인
 
편집부
99년 12월 10일 예술의 전당 오페라 극장에서는 관객들의 환호와 갈채가 쏟아진 가운데 한 대중가수의 공연이 열렸다. 이 날의 주인공은 93년 오페라 극장이 개관한 이래 87%의 유료 관객을 유치하는 기록을 세웠고 예술의 전당에서 처음으로 공연한 대중가수라는 기록을 남겼다. 클래식으로 대변되는 고급문화의 장(場)으로 알려진 예술의 전당에서 대중가수로는 처음으로 공연한 사람, 그가 바로 조용필이다.

조용필의 이 공연은 12월 10일을 시발점으로 3일간 네 차례 계속됐다. 객석은 11월 20일경 모두 매진됐고 뒤늦게 표를 구하는 사람들이 쇄도했다. 그의 인기는 여전했다. 한국의 대중가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오빠부대’를 처음 만든 인물, 조용필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더 이상의 수식어가필요없는 조용필 씨의 열창 모습     © 네이버 이미지검색
조용필은 1950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났다. 이곳에서 초등학교를 나오고 중학교 때부터 서울에서 학교를 다닌 그는 68년 경동고를 졸업하고 가출을 감행, 본격적인 음악의 길로 들어섰다. 물론 그 전에도 그의 음악 인생을 예견케 했던 일들은 있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 하모니카 소리에 감동했고 중학교 때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트럼펫 소리를 듣고 트럼펫을 배우고 싶어했으며, 레이 찰스의 <I Can’t Stop Loving You>를 듣고 기타를 배우게 됐다.

고교 시절에 이르러 음악에 대한 그의 열정은 좀더 확고해졌다. 하지만 그 열정은 가수로서가 아닌 기타리스트에 대한 열정이었다. ‘비틀즈’, ‘벤처스’, ‘롤링스톤즈’ 등의 음악을 들으며 조용필은 기타리스트의 꿈을 키웠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가출했다. 딴따라는 안 된다며 강력히 반대하시던 아버지 때문이었다.

가출 후 ‘아트킨스’ 라는 아마추어 그룹을 만들어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려고 계획했던 그는 ‘레퍼토리’가 없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하지만 그는 이에 좌절하지 않고 꾸준히 노력한 결과 미8군 무대에 설 수 있었다. 이때 그는 야간업소에서 공연했다.

미8군 무대 활동 시절 그는 자신의 길을 바꾸게 되는 계기를 맞았다. 기타리스트의 꿈을 키우던 조용필은 그룹 싱어가 군대에 가는 바람에 갑작스럽게 노래를 부르게 됐다. 이때 그의 노래를 들은 한 미군병사가 다음날이 자신의 생일이라며 그 날 <Lead Me On>을 불러 달라고 요청했고 조용필은 밤새 그 노래를 연습했다. 다음날 조용필의 노래를 들은 그 병사는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 조용필은 이 광경을 보고 노래가 사람에게 얼마만큼의 감동을 줄 수 있는지를 깨닫고 기타리스트를 포기하고 가수의 길을 선택했다.

그 후 여러 그룹에서 활동하던 조용필은 드러머 김대환, ‘사랑과 평화’의 최이철 등과 함께 ‘김트리오’라는 그룹을 만들어 활동했는데 나중에는 최이철 대신 이남이가 들어와 같이 활동했다. 한창 활동하던 1971년 여름 ‘김트리오’는 김대환의 제안으로 부산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부산 광복동에서 야간업소를 돌며 활동하던 조용필은 그 시절 오직 음악만을 생각하며 연습에 몰두했다.

이 시절 조용필을 주류 대중음악계로 끌어올린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는 곡이 황선우에 의해 만들어졌다. 처음에 이 곡은 조용필과 이남이가 통키타를 치며 부르던 포크송이었다. 그러나 1975년 조금 빠르게 편집해 조용필의 두 번째 앨범에 ‘끼워넣기’식으로 넣었던 이 노래는 그를 일약 톱스타의 자리에 오르게 했다.

1976년 뜻하지 않았던 <돌아와요 부산항에>라는 곡으로 유명해진 조용필에게 77년 역시 뜻하지 않은 시련이 닥쳤다. 그 무렵 가요계를 휩쓴 대마초 파동이 그것이었다. 신중현이 구속됐고 많은 가수들이 대마초 파동으로 활동을 중단해야 했다. 조용필은 69년 ‘5핑거스’라는 그룹 시절 미군 병사의 권유로 대마초를 네 번 피운 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속되지 않았는데 1975년 ‘조용필과 그림자’ 그룹 시절 이 사실이 밝혀져 그는 250원의 벌금을 물었다. 당시에는 아직 무명가수라 세간의 관심을 그다지 받지는 못했었다. 그러나 그가 76년에 ‘뜨게 되자’ 그의 이런 경력은 다시 들추어졌다. 그리고 다른 가수와 마찬가지로 활동정지처분을 받았고 그것은 3년간 유지됐다.

3년간의 공백기. 조용필은 이 기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 음악에 대한 열정이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의 축구 스타 이회택과 어울려 낚시를 다니던 그는 자신이 할 일을 발견했다. 어느 여관방에 머무를 때 TV 드라마에서 나오는 <한오백년>이라는 노래를 듣게 된 조용필은 그 순간 국악을 배우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후 그는 국악 음반 20여 장을 사서 따라 부르기 시작했다. 주로 부른 것은 판소리 <흥보가> 중 ‘주걱으로 뺨맞으며 구걸하는 대목’이었다. 미성이었던 그는 목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소금을 먹어가며 연습에 연습을 더한 결과 허스키에 가까워진 음색을 갖게 됐다.

“활동을 못하던 3년간 보이지 않는 기대 속에서 피고름 나도록 소리연습을 했어요. 평범한 진성(眞聲)으로는 스타가 될 수 없는 시대입니다. 먼저 목청을 떨게 하는 탁성(濁聲) 다음에 가성(假聲)에 도전했죠. 탁성은 구토할 때의 음부터 내야합니다. 처음에는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온몸이 가렵고 그러다가 기침이 나오고 토하게 되지요. 이 고통을 반복하다 보면 목이 곪고 피고름이 나옵니다. 토하고 소금 먹고 냉수 마셔가며 이 짓을 했어요.”

그 뒤 밤무대에 한해 활동이 허용되자 조용필은 밤무대에서 노래를 불렀다. 그런 조용필에게 반가운 소식이 들려온 것은 79년 12월 6일이었다. 해금(解禁) 소식이었다. 해금 다음날 조용필에게 라디오 드라마 주제곡을 작곡해 불러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이렇게 만들어진 곡이 <창밖의 여자>였다. 동아방송의 전파를 타게 된 이 노래는 조용필을 다시금 스타의 자리로 오르게 했다.

1980년 <창밖의 여자><정><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담은 그의 1집 음반
1) 조용필은 그 전에도 음반을 낸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이 음반을 자신의 1집 음반으로 규정했다.

1)이 나왔다. 이 음반은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기록인 150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며 대중들에게 깊은 사랑을 받았다. 조용필은 이 음반 뒤에 연이어 낸 음반의 성공으로 80년대 주류 대중음악계를 평정했다.

조용필은 80년 9월 TBC 가요대상 최우수 가요상, 최고인기 가수상, 최고인기 가요상, 주제가 작곡상 수상을 필두로 11월에 열린 서울 국제가요제에서 <창밖의 여자>로 금상을 수상했고 <한오백년>으로 열창상을 수상했으며, 12월에는 MBC가 선정한 10대가수 가요제 가수상과 최고인기 가요상, 작곡상을 수상했다. 81년에도 그의 인기는 계속됐다.

81년 5월 한국연극영화대상 영화주제가 작곡상 수상을 시작으로 12월에는 KBS 방송가요대상 골든디스크상, 전국 PD 선정 최우수 가수상, 최우수 남자가수상, 주제가 작곡상을 수상했으며 MBC 10대가수 가요제 가수상, 최고인기 가요상, 작곡상을 수상했다. 또한 82년 12월에는 KBS 방송가요대상 최우수 남자가수상, 전국 PD 선정 최우수 가수상과 MBC 10대가수 가요제 가수왕상, 외신기자클럽 외신기자상, 최고 남자가수상을 수상했다.

83년에도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83년 12월에 KBS 방송가요대상 최우수 남자가수상, 최우수 작곡상, MBC 10대가수 가요제 가수왕상, 최고인기 가요상과 CBS소니 레코드 골든디스크상을 수상했고 84년 12월에는 일본 후지TV 주최 ‘TV음악제’ 외국가수 특별상, MBC 10대가수 가요제 최고인기 가수왕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85년 12월 KBS 방송가요대상 남자최고가수상, 전국 PD 선정 가수상, MBC 10대가수 가요제 최고인기 가수왕상을 수상했고, 우리 가요 역사상 첫 밀리언셀러를 기록하여 골든디스크상을 받았다. 86년 12월에는 MBC 10대가수 가요제 최고인기 가수왕상, 최고인기 가요상, KBS 방송가요대상 남자가수상을 수상했다. 87년에는 골든디스크 대상을 수상했다. 또한 그는 미국 카네기홀에서 수차례 공연을 했고 일본 NHK에 진출했으며 일본 주요 도시를 도는 투어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이처럼 80년대는 조용필의 시대였다. 조용필이 내놓는 음반들은 불티나게 팔려나갔고 ‘오빠부대’가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가요계의 상이란 상은 모두 휩쓸었던 조용필은 80년대 중ㆍ후반 게임이 안 된다는 이유로 모든 가요상의 수상을 거부하기도 했다. 이처럼 조용필이 우리 가요계에 남긴 족적은 크다. 대중음악평론가 강헌은 그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조용필이 우리에게 선사한 가장 위대한 공헌은 서구 대중음악에 일방적으로 경도돼 있었던 시장의 주도권을 우리 대중음악이 역전시켰다는 데 있다. 세계 메이저 음반산업에 대한 이 보기 드문 기적은 그가 없었다면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스타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던 조용필은 84년 3월 1일 극비리에 결혼식을 올렸다. 전날 밤 신부에게 알리지도 않고 결혼을 결정한 조용필은 7명의 주간지 기자들에게만 이 사실을 통보하고 경기도 남양주군에 있던 봉선사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하객은 운전사와 매니저를 뺀 7명의 기자들이 전부였다. 약혼녀 박지숙과 변변한 패물도 없이 급하게 결혼식을 올린 이유는 조용필의 결혼식에 몰려와 어떤 짓을 할지 모르는 ‘오빠부대’들 때문이었다. 신랑ㆍ신부는 결혼식을 올리고도 각자 집으로 돌아가 자야 했고 이튿날 이 소식이 알려지자 결혼식을 올린 봉선사는 새벽부터 이어지는 문의전화와 항의전화에 곤혹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조용필은 이런 극비 결혼식을 올린 박지숙과 3년 만에 이혼했다. 결혼 생활은 엉망이었다. 조용필은 자신의 이혼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헤어진 지 3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도 아내에게 미안하다. 한마디로 내 이름 때문에 시달린 여자였기 때문이다.”

1980년 <창밖의 여자>로 스타의 자리에 올라 80년대 대중음악계를 평정한 조용필이지만 그는 자신의 인생을 실패한 인생으로 자리매김한 적이 있다. 쏟아지는 인기로 어느새 생겨난 자만심 때문이었다. 이혼 후에도 조용필은 엄청난 소문에 시달려야 했고 술과 담배로 외로움을 이겨내야만 했다. 또, 93년에는 음주운전으로 입건되기도 했다.

조용필은 그런 와중에서도 음악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다. 계속 음반을 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 음악이라는 것은 인생의 ‘화두’이자 인생 그 자체였다.

“좋아하던 골프도 시들해요. 녹음하랴 공연하랴 바쁜 탓도 있지만, 전만큼 재미가 없어요. 그래도 음악만은 언제나 새롭고 물리지가 않아요. 방에 틀어박혀 곡 만들고 연습할 때면 밤을 꼬박 새도 안 졸립고 배고픈 줄도 모르니 참 이상합니다. 그게 팔자인지.”

음반을 계속 내는 한편 조용필은 TV 출연을 자제하고 대중들과 직접 만나는 라이브 공연을 펼쳐나갔다. 한국뿐만이 아닌 미국과 일본에서도 공연을 계속했다. 끊임없는 연습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쉼 없이 연습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50이 가까운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목소리를 유지할 수 있는 이유가 이것이다.

“연습하는 수밖에 없어요. 적어도 보름에 사나흘은 하루 예닐곱 시간씩 연습해야 합니다. 혼자 기타 치며 진짜 공연 때처럼 노래하지요. 외국에 나갈 때도 작은 기타를 갖고 다닙니다.”

조용필은 자신의 노래에 대해서는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실례로 그는 <고추잠자리>를 일곱 번이나 녹음했고 <서울서울서울>은 네 번 녹음했다. 음반 작업을 할 때 그는 소형 카세트를 들고 다니며 자신이 녹음한 노래를 듣고 또 들어 만족할 때까지 녹음을 계속한다. 이렇게 완벽을 추구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그의 ‘노래철학’ 때문이다.

“노래는 그냥 멜로디에 가사가 붙여진 것이 되어서는 안 되며, 그 노래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져야 한다. 노래는 그 시대의 역사를 적는 기록물이고, 모든 사람의 추억도 만들어 내는 것이므로 결코 무심코 만들어져서는 안 되며, 노래는 반드시 듣는 사람에게 책임을 질 수 있어야 한다.”

조용필이 다시 한 번 대중들에게 사랑을 받은 음반은 97년에 나온 그의 16집이었다. 이 음반은 30여만 장의 판매고를 올려 조용필의 건재함을 다시 한 번 보여줬다. <바람의 노래>를 타이틀곡으로 한 이 음반은 이전의 음반과는 달리 조용필의 원숙미를 보여준 것이었다.

“80년대만 해도 무대에 서면 그저 세게 소리를 지르는 게 일이었어요. 하루 예닐곱 무대를 닥치는 대로 뛰던 미8군 가수 시절의 노래 습관을 나이 들어서도 계속 따라간 거지요. 이젠 생각이 달라졌어요. 세게 지를수록 듣는 사람들은 힘들어 한다는 걸 알게 된 거지요. 그래서 에너지는 살리면서도 부드럽게 부르기로 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나이가 들어 파워가 갔다고 그래요. 참 섭섭한 얘깁니다.”

조용필은 99년 12월 MBC와 한국갤럽이 공동으로 행한 여론조사에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가수로 선정됐고 그의 노래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로 선정되기도 했다. 조용필은 94년 3월 재미동포 안진현과 결혼해 이전의 결혼 생활과는 달리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99년 12월 현재-편집자)

조용필은 현재까지 정규 앨범만 17장을 냈다. 그것을 히트곡과 시대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80년 1집(<창밖의 여자><정><돌아와요 부산항에>), 80년 2집(<촛불><간양록>), 81년 3집(<고추잠자리><일편단심 민들레야>), 82년 4집(<생명><비련>), 83년 5집(<친구여><한강>), 84년 6집(<눈물의 파티><정의 마음>), 85년 8집(<허공><킬리만자로의 표범>), 87년 9집(<그대 발길이 머무는 곳에>), 88년 10-1집(<서울서울서울><모나리자>), 10-2집(<큐>), 90년(<추억속의 재회>), 91년 13집(<꿈>), 93년 14집(<슬픈 베아트리체>), 94년 15집(<남겨진 자의 고독>), 97년 16집(<바람의 노래>), 98년 17집(<친구의 아침>).

 
* 본문은 『시사인물사전 3』(인물과사상사, 2000년 1월)에 발표된 것으로 웹진 <인물과 사상>(www.inmul.co.kr)에서 제공했습니다.
기사입력: 2005/08/31 [17:30]  최종편집: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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