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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배려 없는 도발과 만용을 경계한다
박근혜 논쟁과 김규항의 페미니즘 비판에 대해
 
정문순   기사입력  2002/06/07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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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한겨레21 이정용 기자
수그러드는 듯 싶었던 '박근혜 논쟁'이, 돌연 김규항이라는 좌파 논객의 '주류 페미니즘' 또는 급진적 페미니즘 비판이라는 복병을 만남으로써 돌연 좌파 남성 대 '주류 페미니스트들'의 공방으로 변모되는 듯한 상황은 의아스러움과 당혹감을 불러일으킨다. 김규항의 발언에 대해, 평소에 페미니즘에 대한 불편함과 거부감을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하던 그가, 박근혜를 지지하는 일부 여성의 발언을 빌미 삼아 속마음을 드러내었다는 비판을 가하는 것은 어렵지 않아 보인다. 정작 부담스러운 점이 있다면, 여성 정치인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여성들 내부에서 여성의 성적 자질이나 정체성을 논쟁으로 다루어야 하는 현실이다.

박근혜 논쟁이 '주류 페미니즘' 또는 급진적 페미니즘과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그것이 여성이란 어떻게 규정되는가 하는 여성성의 고찰을 근본적으로 요구하는 문제라고 생각할 뿐, 페미니즘 대 좌파 남성의 대립 구도로 옮아가는 진원지로 비쳐지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이처럼 논의의 구도에 물을 흐려놓은 책임은, 박근혜를 지지하는 여성에 대한 비판을 통해 페미니즘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한 좌파 남성의 상식을 밑도는 발언에 멍석을 깔아줌으로써 공론화시킨 미디어의 장삿속에 기인한 바 크다.  

[자료] 페미니즘, 그 논쟁의 경과

여성의 체험이 성적 정체성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 이 땅에서 여성이 자신이 여성이라는 자각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조금이나마 언급해보자. 여성으로서의 자각은, 무거운 짐을 옮기거나 벽에 못을 박는 일에서부터, 전쟁터 같은 일터에 내몰리거나, 군대의 전투 요원으로 배치되는 것에 이르기까지 전통적으로 여성에게 제한적이던 일을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닌 것으로 깨닫게 만든다.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설령 김규항의 말처럼 "보편적 인간 해방 운동"에 이르는 길로 직결될 때에만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자기 존재의 타자성을 직시하고 극복하려는 노력을 치러야 하는 것만으로도 적지 않는 고역이며, 모나지 않고 타협하며 살고 싶은 통속적 욕심을 버리고 자신을 끝없이 담금질해야 할 것을 요구한다.

내가 가장 힘들게 싸워야 할 적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여성주의자로 살고 싶어해도, 태어난 이후 수십 년 동안 길들여진 대로 가부장에게 의존하며 살고 싶은 잠재적 욕구의 출몰과 수시로 대면하지 않을 수 없는 일만큼 두려운 일은 없다. (이런 삶에 대해 '인간 해방'에 무관심하고 '여성 해방'에만 관심을 갖는 것일 뿐이라는 비아냥을 가하는 것이 타당할까?)

내 이야기를 하자면, 몇 년 간 몸담았던 여성 모임을 떠나고 한동안 상실감의 시간을 견디며 기울어진 생각은, 페미니즘이 모든 여성에게 장밋빛 복락을 안겨줄 것이라는 믿음의 허구성을 돌아보는 일이었다. 다른 여성들도 나와 똑같이 사고하며, 나와 그들의 이익이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은, 실상은 남과 나의 차이를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맹목과 무지에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적지 않은 여성들이 남자 못지 않게 페미니즘에 친화감을 갖지 않는 이유는, 그것이 당장 자신에게 이득이 된다는 보장이 없음을 '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식이란, 체험의 축적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식하고자 하는 주체의 의지에서 나온다고 말할 수 있다면, '착한 여자'로 살아가는 여성은 무지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의 태도를 탈바꿈시킬 수 있는 여력을 갖고 있지 못하거나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인지하지 못할 때 타자에 대한 몰이해와 섣부른 일반화로 나아갈 위험성은 결코 적지 않다. 여성인 박근혜가 여성들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그와 비슷한 경우이다.

http://jabo.co.kr/zboard/
사진 : 지난 5월 17일 박근혜의 '한국미래연합' 출범식
행사장 입구에서 '박정희기념관' 반대시위를 벌이고
있는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김재민씨의 1인시위 모습
(대자보 자료사진)
박근혜가 여성이라는 자각을 가질 수 있는 여성인가의 여부는 타고난 성별이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 필요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박근혜를 여성적 자질을 갖춘 사람이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영남의 기득권 정서에 의지하고 있는 정치인인 그녀가 자신을 여성으로 호명할 이유가 과연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그녀가 자신을 여성으로 인지하는 사람이라면, 다른 여성의 성적 억압을 자신의 일처럼 받아들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자신이 부정하고 싸워야 할 대상은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그의 아버지가 주창한 '조국 근대화'와 '한국적 민주주의'를 위해 가장 큰 희생을 치러야 했던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시골에서 상경한 어린 여성들의 노동력 착취의 진원지가 어디에 있었는지 생각한다면, 그는 독재자 아버지를 부인해야 하는 극심한 혼란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 기념관 건립에 앞장서고 아버지의 유업을 계승하겠다는 그의 모습에서 그런 고민을 느낄 수 있을까? 하루라도 수없이 치밀어 오르는 여성이라는 이름을 부인하고 싶은 충동과 싸워야 하는 여성의 눈에, 아버지와의 맞섬을 통한 자기 분열을 겪기는커녕 손쉽게 아버지의 딸이라는 이름을 자랑스럽게 받아들이는 그녀가 어떻게 비치겠는가?

[관련기사]
정문순, 남성 시대의 결별과 박근혜-수구 세력에게 여성의 미래를 투사해도 무방한가? 대자보 82호
정문순, 박근혜는 정치적으로 무죄인가-최보은의 박근혜 관련 발언에 대해, 대자보 78호

페미니즘의 대립각을 남성이 아닌 부정적으로 고착된 남성다움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남성성의 거대한 폭력에 다름 아닌 박정희 신화야말로 일차적인 극복의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정치인 박근혜는 여성인 개인의 이름이 아니며, 영남과 언론의 지역 차별적인 정서가 작용하고 그 정서에 스스로 십분 편승하여 만들어진 정치인임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여성이라고 해서 다른 여성의 삶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여성이면 다 같을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는다면, 개별 여성의 차이를 사소한 것으로 치부하고 남의 생각을 함부로 재단하는 점에서 획일주의와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박근혜에 우호적인 여성들은 경계해야 한다.

그들은 자신과 생각이 같지 않은 여성들의 정서뿐만이 아니라 박근혜의 여성적 자질에 대해서도 제대로 파악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이 애써 박근혜를 아버지와 떼어놓고 사고하는 것은 자매애의 소산이 아니라 다면적 인격체로서의 인간에게서 자신들이 보고 싶어하는 단면만을 보려고 노력한 결과일 따름이다. 결론적으로, 박근혜의 정치적 성장이 여성들에게 유익할 것이라고 믿는 '최보은'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받는 사회적 억압에 관심이 없어서 '주류 페미니즘'이 싫다는 김규항이나, 각각 자신의 타자 격인 박근혜나 다른 여성들 그리고 '주류 페미니즘' 편에 설 여성들에 대한 성찰의 게으름을 합리화하거나 조장함으로써 여성성에 대한 몰이해와 섣부른 진단에 이른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여성의 정치 세력화를 위해서라면 남성의 유산까지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는 일부 여성의 환타지는 비판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하지만, 이를 '유한하기 짝이 없는' 부르주아 여성들의 철없는 도발로 평가하는 김규항의 태도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 없다. 박근혜 지지론이 등장하게 된 배경이 극도로 열악한 여성의 정치적 지위와 무관하지 않음을 조금이라도 파악한다면 결코 감행할 수 없는 발언일 것이다. 박근혜 활용론이나 지지 발언의 함정은 다른 여성이 자신의 타자일 수 있음을 살피지 못한 일부 여성의 오판으로 설명되어야 할 문제이지, 남의 사회적 억압에 관심이 없는 태도라고 매도되어야 할 것이 아니다. 남의 억압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픔을 남의 고통으로 쉽게 동일화하려는 타자성의 윤리가 결여된 점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박근혜 논쟁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보면서, 타자에 대한 배려와 여성 개개인의 정서에 대한 살핌이 참으로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이렇게 말하는 나 역시 논쟁 당사자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한 탓일까.    

사족으로 김규항에게 한마디.
급진적 페미니즘이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을 박근혜 지지자들에게 붙여줘서 무척 기분 나쁘다. 본디 급진 페미니즘의 토양은 좌파 진영으로서, 그들이 여성을 포함한 약자를 대변하지 못한다는 자각에서 나온 것임을 살폈으면 좋겠다. 한국에는 급진적 이념이 너무 없어서 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가? 급진은 커녕 가난한 나라의 어린 여자아이들의 노동을 착취하여 만들어지는 공으로 한창 시합이 이루어지고 있는 공차기 대회에 반대하거나, 제 입에 밥이 들어가지 않는데도 월드컵이라는 것에 온통 미쳐버린 국가주의자들을 우려하는 여성들의 목소리라도 속 시원히 들어보았는가? '주류페미니즘'이라는 이름 붙이기는 당신의 발언 중에서도 압권인 바, 한 줌의 영향력도 가진 것 없는 상대를 주류와 비주류로 나누는 것은 무시무시한 폭력이라고 생각한다. 하긴 드러내놓고 부권 회복을 외치는 사회주의자도 보았지만, 당신의 발언은 좀 심한 것 같다. 대다수 좌파 남성들의 생각이 당신과 같다면 참으로 끔.찍.하.다 약자에 둔감한 좌파를 어떻게 이해하라는 말인가? 나는 좌파에 대해 기본적인 신뢰감을 상실하고 싶지 않은 여성이다.

* 필자는 문학평론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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