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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시대의 결별과 박근혜
수구 세력에게 여성의 미래를 투사해도 무방한가?
 
정문순   기사입력  2002/04/28 [04:30]
{IMAGE2_LEFT}최보은이 ‘월간 말’과의 인터뷰에서 박근혜에 대한 지지를 거론했을 때만 해도, 그것을 위악성이 다분한 발언으로 이해하고자 한 사람은 나만이 아닌지 모른다. 빗발치는 비난을 무릅쓰고라도, 그녀는 여성이 처한 열악하기 이를 데 없는 정치적 현실에 대한 여론을 환기시키거나, 여성의 정계 진출에 대한 논의를 활성화시키려는 목적으로, 계산된 ‘오버’를 감행한 것이라고 알아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도발적 인터뷰가 박근혜라는 한 정치인에 대한 지지냐 반대냐의 논쟁으로만 비화되는 것에 대해, 그녀로선 마음 고생을 적지 않게 했거나, 애초의 발언 자체를 후회할지 모른다고 짐작하며 안타까운 마음도 가졌다. 그러나 뒤늦게 최보은의 박근혜 인터뷰 기사를(‘진흙탕 정치판 헤쳐나갈 신념 있다’, 2002.3. 월간 말) 대하고 보니, 사실은 그게 아니었던 것이다. 알고 보니 그녀의 박근혜 지지는 보태고 뺄 것 없는 ‘진심’이었다.

[관련기사]
박근혜가 출마하면 나는 그를 찍겠다-페미니스트들의 연쇄 인터뷰-최보은, 월간 말 3월호
최보은 / "박근혜를 찍어야 진보"라는 말을 한적이 없다
변현단, 여성 스스로 볼모의 족쇄를 채우는 자들이여, 대자보 76호
이승훈, 여성주의와 박근혜대통령만들기, 대자보 76호
박근혜를 밀까? 말까? 여성계는 논쟁중, 한겨레신문(2002. 3. 18)

같은 인터뷰라도 질문자가 어떤 시각을 가지느냐에 따라 인터뷰를 받는 사람의 상은 크게 다르게 그려질 수 있다.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사람이라도 어렵지 않게 선량한 인물로 둔갑시켜놓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지 모른다. 최보은의 손에 의해 박근혜는 박정희의 그림자도 비치지 않는 “훈련된 여성 정치인”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밑그림의 근거는 이 여성 정치인의 “원칙에서 우러나온 달변”과 “철저히 체화된 자기검열”때문이라고 한다. 이 표현에 대한 시비는 뒤로 미루고 인터뷰 풍경부터 한 장면 보자.

최보은을 포함한 여러 인터뷰어들: “왜 자꾸 아버지와 자신을 연관시키는 거죠?”
박: “제가 아버지를 기리는 건 천륜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고, 인터뷰 때는 얘기 안 해도 기자들이 꼭 물어요.”

{IMAGE1_RIGHT}최보은과 여러 명의 여성들이 합동으로 박근혜를 불러낸 자리이다. 이에 대한 반박 질문도, 인터뷰를 정리한 최보은의 비판적 논평도 없다. 박근혜 스스로 아비의 ‘근대화’ 유업을 계승하겠다고 말해오지 않았느냐는 대거리도 없다. 오히려 최보은은 이러한 변명을 현실 정치인으로서의 유능함을 드러내는 지표 쯤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실망스러움은 최보은이 다음날 박근혜와 가진 단독 인터뷰에서 배가되고 있다. 그는 정곡을 찌르는 질문으로 답변자를 곤혹스럽게 만들기는커녕, 인터뷰어 답지 않게 상대방에게 심리적으로 제압당한 모습까지 보이고 있다. 가령 최보은이 “아버지 통치 하에 희생당한 분들을 위해 사과를 요구받는다면 사과하실 생각이신가요?”라고 묻자 박근혜는 “잘못된 일에 대해서는 분명히 사과를 해야겠지요.”라고 답한다. 이에 대한 최보은의 논평이 걸작이다.

“그랬단 말인가? 나는 몰랐다, 이런. 그러나 이 답을 통해, 나는 박 의원이 아버지 박정희에 대한 혈연적 유대를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대상화하려는, ‘홀로서기’의 의지를 읽어낼 수 있었다.”

백기를 들었다고 표현한다면 적당한 말이다. 박근혜의 ‘사과’ 운운하는 발언은 최보은의 말대로 정략적인 계산 하에서 도출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비의 잘못을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이용하는 것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다. 박근혜로서도 달가워하지 않을 해석을 거침없이 하는 최보은에게, 박근혜 스스로 아비의 죄에 대한 사과가 진실됨을 입증하려면 아비를 기리는 기념관을 짓는 것부터 말려야 한다는 말은 내비치기조차 어렵다.

물론 박근혜는 신인답지 않게 노련한 정치인인지도 모른다. 노회함이나 노련함은 현실 정치판에서 입지를 잃지 않을 수 있는 유리한 자산일 수도 있다. 최보은이 희구하는 것은 그러한 자질을 갖춘 여성 정치인이 진흙탕 같은 정치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를, 아니 최고집권자의 위치까지 이를 수 있는 것이다. 노회함은 정치인으로서 좋은 덕목인지 모른다. 박정희도 그랬다. 용인술의 천재라고 하지 않던가? 변신과 배신의 천재, 다까기 마사오. 3선 개헌 후 국민들에게 한번만 더 자신을 찍어주면 다시는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말을 유신으로 절묘하게 실천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정치 9단인 세 김씨들. 전장에서 전략을 세우듯 권모술수나 협잡모의에 능한 것도, 오로지 흙탕물 정치판에서 단련된 정치인이 구비하고 있는 미덕인지도 모른다, 정치적 올바름의 여부를 판단하지 않는다면.  

문제는 이러한 생각에 최보은만 젖어 있다는 것이 아니다. 4월 22일자 한겨레 신문에서 논설 위원 김선주는 [여성도 ’지저분‘해져야?]라는 칼럼에서 박근혜를 이용하는 남성정치인들이 정치 9단이라면, 여성들도 필요에 따라 그녀를 활용하는 것이 나쁘지 않다고 말한다. “가장 더러운 진흙탕인 정치판”에 발을 들이려면 흙이 안 묻을 수 있느냐는 말을 덧붙인다. 물론 김선주는 정치판의 지저분함은 ’현실‘일 뿐 ’본질‘과 ’당위‘는 아님을 알지 못한다. 현실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김선주의 모습에서, 입만 열면 정치인 욕을 하다가도 그들과 자그마한 인연이라도 맺고 싶어 안달하는 다수 국민의 정서를 본다고 말하면 지나칠까.

최보은과 김선주는 정치권에 여성을 진출시키려면 현실 정치판의 생리를 무시할 수 없다고 말한다. 물론 여성의 정치세력화와 여성 연대라는 궁극적인 대의를 위해서다. 그러나 과연 계급과 사상을 뛰어넘는 여성연대가 가능하다고 보는가? 왜 당신들에게는 여성이 하나의 얼굴로밖에 보이지 않으며, 여성은 하나의 이해 관계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가? 부르주아 여성이 하층 여성의 고민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다고 보는가? 생계를 위해 하루라도 쉴 수 없는 여성 가장들은 ’치마 두른‘ 대통령에 목매다는 당신들이 사치스럽게만 보일지 모른다. 마찬가지로 서구 백인 여성이 아시아 아프리카 여성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겠으며, 미국의 아프간 공격 시에 아프간 여성의 해방 운운하며 부시의 장단에 놀아나던 미국의 자칭 페미니스트들이 다른 인종의 여성과 어떻게 자매애를 공유할 수 있겠는가? 여성은 과연 계급을 초월한 이름이며, 여성에게 진보라고 무조건 유익한 것도 아니며, 보수라고, 수구라고 쓰레기통에 내버릴 것은 못된다는 말인가?

아무래도 이들은 ‘수컷들의 세계’를 정말 동경하는 것 같다. 영화 [친구]를 본 감상문에서, 여자들이 남자와 경쟁하려면 학연, 지연, 혈연 관계로 중첩된 남자들의 친구 관계를 긍정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최보은이다. 이들이 현실의 지평을 떠나서 사고하길 권유할수록 현실의 속악함을 수용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은 안타깝기만 하다. 맹목은 무섭다. 내가 한 동안 몸 담았던 어느 여성단체의 대표는 최보은의 인터뷰 내용을 동인들에게 읽히고 그들로부터 박근혜를 반대하지 않는다는 의사를 끌어낸 후 그것을 자신의 박근혜 지지 발언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박근혜가 과연 독재자의 딸이기만 한가?”라고 묻는다. 내게 묻는다면,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것이다. 박근혜는 단 한 번도 독재자의 딸이란 영역 밖에서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설정한 적이 없으며, 한편으로는 유신통치기에 퍼스트레이디와 육영재단 이사장을 지내고, 머리 허연 노인네들 앉혀놓고 충효가 어떻고 하며 강연 다니기 바쁘던, 집권 세력의 일부를 점한 자이기도 하다. 박근혜는 아버지를 잘못 둔 불운한 여성일 뿐이 아니라, 역사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한 존재인 것이다.

나는 박정희 정권의 과오가 개발독재와 인권 탄압에만 머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남긴 가장 큰 잘못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하면 된다’는 식의 왜곡된 가치관을 사회 전반에 고착시킴으로써 공동체 의식의 파탄을 불러온 데 있다고 생각한다. 사회의 습속으로 굳어진 이러한 가치 전도는 오랜 세월이 지나도 쉽게 바뀔 수 없는 것이다. 상식과 합리 따위는 찜쪄 먹은 타락한 남성적 가치를 쉽게 외면하지 못할 정도로 여성의 정치적 현실이 절박함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소한의 원칙과 도덕을 저버린 데 대한 대가는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박정희 통치기의 후유증을 지금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우리 현실이 잘 말해준다. 그 현실이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만들어준, 수구 세력의 향수를 웅변하는 존재에게 여성의 미래를 투사해도 무방하다는 사고가 나는 두렵기만 하다. 나의 생각이 여성 인식이 불철저한 탓이라면 차라리 좋으련만.      

[관련기사] 정문순, 박근혜는 정치적으로 무죄인가? 대자보 77호
공희준, 박근혜를 찍으면 이회창이 됩니다-테르미도르는 보은(報恩)을 모른다, 대자보 77호
* 사진출처 : 한겨레21 및 박근혜의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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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4/28 [04:3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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