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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지지, 진보적인가?
 
정문순   기사입력  2002/04/02 [10:03]
{IMAGE1_LEFT}집권 여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로 떠오른 노무현 고문에 대한 진보 인사들의 지지가 그칠 줄 모르고 있다. 그가 대통령 경선 후보로 부각된 이후 표명되기 시작한 각계의 지지는, 대다수의 예상을 뛰어넘어 그가 당내 경선에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여론 조사 결과 야당의 유력한 후보와의 대결에서도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나면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는 것처럼 보인다. 민주당의 재집권 가능성이 현실적으로 희박해 보이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각할 수 없었던 풍경임에 틀림없다.

민주당 대선 후보에 대한 진보 진영의 지지는 지난 87년 선거 때의 ‘비판적 지지’라는 선례가 이미 있으므로 새삼스러운 일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90년대 이후의 정치 구도가 ‘민주 대 반민주’에서 ‘보수 대 진보’로 변화한 상황을 감안한다면, 보수 정당의 인사에 대한 진보계의 지지가 다시 발언권을 얻고 있는 현상은 의아스러운 일이라고 충분히 말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할 지 혼란스럽기까지 하다.

제도권 정치인 중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개혁적인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에게 쏟아지는 관심과 지지는, 진보 진영과의 관계가 우호적인 편이었던 김대중 정부의 출범 초기의 모습과 겹쳐진다. 정권 교체 이후 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이 드높던 시기였다. 그러나 취임식 단상에 올라 국민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며 울먹이던 집권자는, 노사정위원회에 노동계 대표를 끌어들이던 때가 언제 있었느냐는 듯 임기 내내 역대 어느 정권 못지 않게 노동계와의 대립과 갈등을 일삼아 왔다. 다국적 자본을 권력의 주요한 지지 기반으로 가지고 있는 김대중 정부로서는 태생적으로 노동자에게 적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혹자는 김대중 정부가 집권 내내 실정에 실정을 거듭했지만, 남북화해 작업과 언론 개혁을 시도한 점은 높이 살 만하다고 말한다. 분명 이러한 작업은, 냉전의 질서 위에 구축된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의 매듭을 푸는 작업과 연관되어 있으므로, 그 성과를 과소평가하기 어렵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수구기득권 세력의 필연적인 저항을 불러올 수밖에 없는 남북 관계 개선이나 언론 개혁은, 노동정책의 향방과 근본적으로 별개의 문제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도 고구마줄기처럼 한 뿌리를 가진 문제에서 어느 한 쪽만 개혁의 대상이 되고, 나머지는 전혀 그렇지 않은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개혁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그것이 한 사회의 근본적인 질서를 바꾸어내는 다른 작업과 연관되어 있음을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라고 볼 수 없다.

이를테면 국가보안법의 개폐에 대한 시도가 없는 한 남북 관계의 개선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말하기 어려우며, 미국에 대한 군사적 예속에 대한 문제 의식이 없는 국민복지의 주창은 공염불에 그칠 위험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김대중 정부의 임기 내내 개혁이 표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회를 전면적으로 바꾸는 것에 대한 욕구가 절실할 것 없는 보수적 기반을 가진 정치 권력의 한계에서 연유한 것인지 모른다.  

엄밀히 말하여 김대중 정부의 가장 큰 치적으로 일컬어지는 남북 관계의 진전은, 북미 관계 개선의 분위기가 무르익던 당시 동북아 정세와, 다국적 자본의 이해가 국내에 충실히 관철된 데 따른 보상으로 햇볕 정책에 주어진 세계 각국의 지지, 무엇보다 북한과의 적대적 공존 관계를 권력 유지의 전제 조건으로 유지할 필요는 없는 김대중 정권의 기반 등과 떼어놓고 설명하기는 힘들다. 다시 말하면, 근본적인 사회 개혁에 대한 의지나 전망이 내재되어 있지 않은 한, 몇몇 진일보해 보이는 정책은 그 자체로 모순을 내재하고 있으며, 기득권의 저항이나 외부적 상황에 따라 쉽게 좌초하거나 표류할 위험이 적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부시 행정부 이후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 관계가 그것을 잘 말해준다.  

{IMAGE2_RIGHT}이에 반해 노무현 고문의 정책은 자신이 몸 담고 있는 김대중 정부와 얼마만한 차별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마 그는, 측근을 기용하는 데 집착하여 지역갈등의 굴레에서 헤어나지 못한 김대중 정부와 달리, 그 자신이 실천적으로 보여준 대로 지역화합의 정책에 관한 한 기대를 가져도 좋을 것이다. 이번 경선의 모토로 ‘국민화합’을 내세운 것도 그의 주된 정책의 방향을 잘 말해준다. 물론 앞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지역차별의 극복이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개혁 작업과 관련된 것이라면, 다른 정책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도 최소한의  개혁성을 탈각시키지 않는 일관적인 태도가 요구된다. 그가 집권하게 된다면 주력하게 될 동서화합과 언론개혁은, 조선일보와 영남으로 대표되는 수구기득권 세력의 지배와 충돌을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근본적이다. 곧 이것은 공기업의 민영화와 정리해고 등을 통한 독점자본의 전면적 지배 문제, 그리고 노동자의 생존권 문제와 무관한 사안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진보계 인사들이 노무현 고문을 지지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에게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최근 경쟁 후보의 이념공세에 대해 노동자에 대한 주식 분배를 분명히 반대한다고 밝힌 것은, 그의 노동정책의 보수성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힘없는 서민-민주당의 지지기반은 정리해고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한 중산층 이상으로 이미 업그레이드되었다. 그러나 강산이 여러 번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나 지금이나 자신들의 지지 기반이 중산층과 서민에 있다는 말을 아끼지 않는다. 중산층은 분화되고 있고 서민은 빈민에 가까워지고 있는 구제금융 이후의 사회 변동을 전혀 반영하지 않은 것이라 볼 수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보수정당들이 말하는 서민은 소규모 자영업자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을 보호하겠다는 그의 공약과, 노동자의 경영참가를 수용할 수 없다는 태도는 서로 상치되지 않는가?

또 서민을 위해서라면, 과연 그는 한 나라의 신경이자 핏줄인 국가 기간산업의 민영화를 반대할 수 있을까? 반대하지 않는다면, 그 와중에 발생하게 될 정리해고자들을 흡수할 사회적 안전망의 확충에는 관심이 있을까? 서민층의 보호에는 사회복지예산의 확보가 필수적인 바, 예산을 마련하기 위해 부유층의 부의 세습을 저지하려고 노력할 수 있으며, 나아가 군비 지출 감소도 고려할 수 있을까? FX사업 같은 군전력 증강사업에 대한 비판적 여론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일 수 있을까? 보수정당의 인사인 그에게 진보주의자가 될 것을 요구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가 주요하게 추진할 ‘국민화합’ 정책이나 ‘언론개혁’이 사회의 근본적인 개혁에 대한 최소한의 전망을 몰각하지 않는 기반 위에 전개될 수 있는지, 대문은 닫아 놓을 망정 쪽문 하나는 비스듬히 열어두어 바람을 조금이라도 들일 뜻이 있는지 물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보 인사들이, 여당의 인사로서보다 개인 정치인으로서 노무현에게 보내는 지금의 지지는,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권력 관계나 사회구조의 치밀한 검토에서 도출된 것이라기 보다, 인물의 도덕성과 개혁성 등의 개인적 자질, 그리고 당선 가능성 같은 현실적 여건을 중시하는 데 기울어져 있는 듯이 보인다. 정리해고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노동자들에게 경찰이 방패 세례를 가하고, 식당 여성 노동자들 전원이 밥주걱을 빼앗기고 일순위로 해고된 후 몇 년 째 복직 운동을 하고 있는 나라(정문순, 밥꽃양은 당신의 뒷모습입니다, 대자보 78호)에 사는 진보 인사들은, 김대중 정권의 실패로부터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했다는 말한다면 지나칠까? 그들은 진보진영의 역량으로써 그가 ‘작은 김대중’이 되지 않도록 추동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진보 진영이 중도보수적 정치인을 지지하는 것은 탄력적이고 유연한 사고의 소산일까, 아니면 김대중 정부 이후 갈수록 연성화된 그들의 위상을 반영하는 것일까?

솔직히 말하면, 김대중 정권에 대한 실망과 허탈을 넘어 분노에 이르렀다고 말한 진보 진영이, 요원의 불길 번지듯 집권당의 경선 주자에 대한 지지를 표하는 것에 대해 곤혹스러움이 앞선다. 한편에서는 민노총의 연대파업이 선언되고, 다른 한 편에서는 ‘국민축제’라는 이름의 국민경선이 화려하게 전개되고 있는 이 현실이, 모두에게 벚꽃 흩날리는 4월의 화사한 풍경으로 다가오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착잡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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