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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제의 난(亂)은 없다
대세론과 대안론이 만날 때
 
공희준 Cinema Jockey   기사입력  2002/03/17 [02:39]
정치학을 전공한 이들에게 주변 사람들이 흔히 던지는 질문 가운데 하나가 다음번 대통령은 누가 될 것 같으냐는 물음이다. 평소에 정치를 심심풀이 땅콩으로 여기던 치들도, 정치인 알기를 동네 강아지 만도 못하게 봐오던 부류도 다음 번 청와대 주인이 누구일 것인가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모두들 눈빛이 초롱초롱해지며 나름대로의 설(設)들을 풀어낸다. 우리나라처럼 정치권력의 향방에 사회 각 분야가 민감하게 요동치는 풍토에서는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과열된 선거 분위기가 나라를 망친다며 정치지형의 변화가 가져올 기성질서의 변동을 두려워하는 집단에서 엄살을 떨어대는 와중에서, 사회에 진출한 이후 줄곧 찬밥 신세로 머물러온 정외과 출신들로서는 대통령 선거로 온 나라가 들썩이는 “시즌”만큼 즐거운 시간도 없다.

상대생들의 실무능력에, 공대생들의 기술력에, 어문계열-특히 영문과나 일문과 출신들-의 어학능력에 주눅들어온 정외과 졸업생들로서는 대통령 선거시즌이야말로 간만에 전공을 발휘해 분위기를 휘어잡을 수 있는 황금기인 셈이다. 정외과 졸업장을 받은 나 역시 이맘때만 되면 주위의 호사가들로부터 차기 대통령 감으로 누가 가장 유력하냐는 질문을 받곤 한다. 그럴 경우 질문자에게 어떤 사람이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선출되는 것이 바람직한지를 곧바로 되물은 후, 상대방이 호감을 가진 정치인이 다음번 대통령으로 선출되도록 작은 실천을 해보라고 권유한다.

솔직히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결과를 적중시킬 능력이 나에게 있었으면 지금 당장 경마장이나 증권사 객장으로 달려가 대박을 터뜨렸을 것이다. 예측불허의 돌발변수로 가득찬 한국정치에서 차기 대통령을 정확히 알아맞추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차기 대통령이 누가 될지 족집게처럼 집어낼 수 없다는 것이 대권의 쟁취자로 누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활발한 논의까지 봉쇄하거나 억누르는 구실은 되지 못한다.

대통령 선거와 관련하여 이제껏 우리나라에서는 국민이 원하고 나라에 필요한 대통령상에 대한 진지한 모색 대신에 거대 언론에 의해 주도되는 누가 누구를 이기며, 누가 누구와 손잡을 것인가에 대한 경마장식 중계만이 난무해 왔다.

따라서 정견과 이념에 바탕한 건전한 정책논쟁보다는 인물본위, 출신지역 위주의 세싸움과 머릿수 늘리기가 정치의 중심을 차지했고, 이러한 상황에서 투표라는 능동적 행위를 통해 정치권력의 창출에 주체적으로 참여해야 할 국민다수는 킹메이커를 자처하는 메이저 언론사가 유포하는 대세론에 경도되어 이리저리 휩쓸리는 장기판의 졸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조금이라도 남과 다르거나 남에게 뒤처지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이 지배하는 우리사회에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승자의 대열에 합류하고 주류에 편승하려는 ‘악단차 효과(Bandwagon Effect)’가 한층 극성을 부리기 마련이다.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의 주류론이나 이인제 민주당 고문의 대세론 모두 악단차가 울려대는 소란스런 음악소리의 볼륨을 한껏 높이는 전술을 택함으로써 손쉽게 정권을 차지하려는 전형적 수법으로 분류될 수 있다.

{IMAGE1_LEFT}그런데 요즘 들어 정치권에서 필승카드로 통용됐던 세몰이가 별로 약발이 먹히지 않아 두 사람의 애를 태우고 있다. 소수의 거대 언론사가 언로를 틀어쥐고 일반 대중에게 특정한 정치적 담론을 일방적으로 주입시키고 강요했던 구태의연한 정치방식을, 정보통신기술의 발달과 인터넷 대중화의 결과로서 민주적인 네트워크형 의사소통구조가 정착되어진 포스트 3金시대에까지, 그 실효성을 검증하지 않고 무리하게 끌고 온 것이 화를 자초한 것이다.

1997년 대선에서 맨주먹으로 일군 500만표에 의지해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무혈입성하려던 이인제(IJ) 고문으로서는 민주당의 전통적 아성인 광주에서 치러진 국민경선에서 노무현 고문에게 완패했다는 사실이 심각한 정치적 타격 못지 않게 커다란 심리적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더욱이 지난 번의 신한국당 경선과는 달리 민주당 당권파라 할 동교동 구파의 지원까지 업고 있는 이고문으로서는 현재와 같은 판세로써 경선판도가 돌아가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으리라. 정리하자면 안방인 대전충남 지역에서 압도적인 표를 얻지 못할 경우 IJ가 노무현 후보에게 역전을 거두기 어렵다. 연고지역에서 몰표를 얻어 선두로 치고 나간다 해도 이는 앞으로 남은 국민경선 일정상 유권자수 면에서 충청지역보다 훨씬 많은 영남권의 역풍을 부를 가능성을 배제하기 힘들다. 2순위표 개표절차 필요 없이 과반수 득표로 대권가도를 질주하려던 이고문 진영에겐 빨간 신호등이 켜진 것이다.

벌써 일각에서는 국민경선 후 IJ가 모종의 중대결심을 할 것이라는 예측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다. 그렇지만 1997년 신한국당 경선과 금년 민주당 국민경선은 몇 가지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어 이고문의 운신폭을 제약하고 있다.

{IMAGE2_RIGHT}우선 노무현 고문에게는 이회창 총재의 병역문제 같은 치명적인 개인적 흠결이 돌출할 개연성이 별로 크지 않다. JP, 이회창, 거기에 모친의 고향이 충청도인 박근혜 의원까지 가세하여 서로 충청도의 맹주를 주장하며 난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IJ가 특정지역에 기반하여 과감한 대권 드라이브를 거는 방법도 그리 녹록하지는 않다. 결정적으로 이고문이 독자행보를 모색하는 극약처방을 택한다 해도, 이런 해법은 국민의 뇌리에서 5년 전의 불복사태와 필연적으로 중첩되어 상승작용을 일으킬 것이 명약관화하므로 결코 현명한 선택은 아닐 것이다.

상도동 문하생으로 정계에 입문한 이고문에게 1971년 신민당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서 DJ에게 분루를 삼킨 후에 마음을 추스르고 대통령 선거 유세전에 매진했던 김영삼을 벤치마킹하라고 당부하고 싶다. 그 당시 뿌린 자산과 희생이 이후 한국 정치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한 YS라는 거목을 탄생시킨 배경과 토양을 이룬 것이다.

설사 국민경선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해도 아직 기회는 많다. 정치는 살아 움직이는 생물이고 가능성의 예술이다. 대통령 선거까지는 아직 9개월이란 충분한 물리적 시간이 남아 았다.

전열을 정비한 한나라당과, 박근혜-정몽준-김덕룡을 축으로 꾸려질 신당이 겨룰 6월 지자제 선거결과가 최종적인 판단기준으로 작용할 것이다. 민주당이 승리한다면 노무현 후보와 나란히 전국을 순회하며 차차기 대권주자 영순위로 최소한 향후 20년간 한국정치를 쥐락펴락할 발판을 구축하게 된다. 만약 지자제 결과가 좋지 않으면 이인제 대안론이 탄력을 받을 것이다. 대세론 대신 대안론으로 본선에 출전하는 것도 정치의 세계에선 반드시 기분나쁜 일은 아니다.

백주대낮에 도지사 공관에 난입하여 자민련 소속 도지사를 빼내가려는 한나라당의 오만방자함을 보고도 핫바지처럼 뾰족한 대책없이 분기탱천만 해야하는 무력하고 영락한 JP의 모습을 보고 하도 열받은 공주사람인 내가 논산사람인 이인제 고문을 위해 헌사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충언으로 받아줬으면 좋겠다. 같은 고향 사람이 상습적 대선 출마자의 오명을 뒤집어쓰는 광경은 전혀 보고 싶지 않은 충정의 발로에서 하는 말이다.

한나라당이 오매불망 소망하는 “2차 인제의 난(亂)”은 단연코 없을 것이란 희망섞인 관측을 많은 이들과 더불어 함께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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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3/17 [02:3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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