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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이회창 - 대세론에서 필패론으로
 
공희준 Cinema Jockey   기사입력  2002/03/18 [03:40]
{IMAGE1_LEFT}한나라당에 비상이 걸렸다. MBC와 한국갤럽이 공동으로 실시한 대선 예비주자 여론조사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와 민주당 노무현 고문이 12월 실시되는 제 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맞대결을 펼칠 경우, 비록 오차범위 내에서이지만 근소한 표차로 노무현 고문이 이총재를 따돌린다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더구나 평소 ‘밥’이라고 여겨왔던 이인제 고문과의 지지도 격차 역시 여론조사에서 급속히 줄어들고 있어 이총재로서는 이번 대선에서의 승리를 장담하기가 어려운 형국이다. 며칠 전에 실시된 문화일보-SBS 여론조사에서도 비슷한 조사결과가 드러났다는 점을 감안하면 기존의 대선구도에 엄청난 지각변동의 휘몰아치고 있음은 틀림없다 하겠다.

이회창 총재에게 최근 며칠 동안 벌어진 일련의 흐름은 기억하기조차 끔찍한 97년 정국을 떠올리게 할 것이다. 5년 전 이총재는 지금은 정치적 앙숙으로 돌변한 허주(김윤환)가 주도한 세몰이식 경선전략에 힘잆어 신한국당 대선후보자리를 차지했었다. 여기에는 한보사태와 김현철 파문으로 레임덕 상태에 빠진 YS가 민주계 중심의 정권재창출을 포기한데 따른 반사이익이 크게 작용했다. 이인제 경기지사에 비해 훨씬 본선경쟁력이 취약했던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는 민정계 중심의 조직동원으로 어려움 없이 대선후보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2002년 민주당 경선에 비교해 볼때, 지난 신한국당 경선은 대의원 줄세우기와 이른바 김심(金心)잡기가 승패를 가른 무늬만 경선을 면치 못했다. 집권 마지막해를 맞은 김영삼 대통령이 정치적 뇌사상태에 빠지지 않았고, 일반 유권자가 참여하는 제대로 된 경선이 치러졌더라면 이회창씨가 신한국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을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아 있다.

승리의 기쁨도 잠시, 곧이어 불거진 두 아들의 병역기피 의혹으로 말미암아 이후보의 인기는 삽시간에 급전직하했고 이것은 이인제의 경선불복과 뒤이은 탈당을 불러운 빌미가 되었다. 조순과의 밀약으로 후보단일화의 승부수를 띄우고, 몇몇 거대신문사까지 가세한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의 몸부림도 한번 등을 돌린 민심 앞에서는 전혀 효험이 없었다.

신한국당 경선이 후보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수반되는 진정한 의미의 예선전으로 진행됐다면 선거를 통해 최초로 야당에 정권을 내어준 여당으로 기록되는 수모는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제들의 병역의혹이 국민에게 던졌던 충격파도 어느 정도 완화되었을 것이며, 후보간 토론회와 지역별 경선을 거치면서 일반 서민들이 이회창씨에게 품었던 딱딱하고 근엄한 귀족적 이미지도 상당 부분 희석되었을 것이다.

한나라당은 2000년 봄 실시된 16대 총선에서 영남지역 몰표와 서초-강남-분당을 잇는 강남벨트 싹쓸이로 제1당의 지위를 회복했다. 원내 다수의석 점유는 97년 신한국당 경선에서 의원 줄세우기로 가장 많은 현역의원을 확보했던 것과 비견된다 하겠다. 당연히 이총재는 건전한 정책대결에 바탕해 국민 일반의 표심을 파고 들기 보다는, 원내 다수당이라는 유리한 고지를 근거로 김대중 대통령을 압박하는 세몰이 전술을 대선전략으로 채택했다. 대세론이 본격적으로 닻을 올린 것이다.

정권 후반기 각종 게이트와 부패추문에 휘말려 급속한 권력누수를 겪고 있는 DJ의 입지도 신한국당 경선에서 당내 제어력을 발휘하지 못한 YS의 처지와 비슷했던 것이 이총재의 대세론에 한층 무게를 실어줬다. 그렇지만 이 과정에서 이총재는 중대한 판단착오를 범한다. 지구당 위원장의 통제하에 놓인 제한된 범위의 대의원들만이 투표권을 행사하는 당내 경선과는 판이하게 대선은 만 20세 이상의 모든 국민이 참여할 수 있다. 그는 이 본질적 차이를 간과한 것이다.

{IMAGE2_RIGHT}MBC 백분토론에서 주류측 패널로 출연한 홍준표 의원은 결과도 뻔한데 굳이 귀찮게 경선은 해서 뭐하냐는 뉘앙스를 풍기는 언급을 했다. 대중정치인으로서의 정치적 센스가 떨어지는 홍의원의 오버만으로 해석하기에는 그와 이총재 사이의 각별한 관계가 심상치 않은 복선을 던진다. 옆자리에 앉았던 노련한 박희태 의원이 황급히 홍의원의 발언을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이총재의 속내와 복심이 담긴 천기를 공중파 방송에서 부주의하게 누설했으리라. 경선은 필요하지 않다는 정서가 당내에 팽배한 가운데 경선의 공정성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해당행위로 매도되는 분위기에서는 박근혜 의원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탈당을 결행했을 것이다.

월드컵 본선을 석달도 남겨 놓지 않은 시점에서 축구 국가대표팀이 아직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치열한 예선전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동출전권을 획득하는 개최국의 이점을 살릴 수 있는 것도 프랑스의 경우처럼 팀의 전력이 일정 수준 이상에 올라선 다음을 전제한다. 예선전을 통과하면서 팀전술이 다져지고 주전선수가 확정된다. 대통령 선거도 마찬가지다. 당내 경선을 치르는 과정에서 후보자의 경쟁력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다. 월드컵에서도 전대회 우승국에게만 본선 자동진출권이 부여된다. 하물며 이총재는 15대 대선에서 승리하지도 못하지 않았는가.

예선전 격이라 할 당내 경선조차 이리저리 회피하면서 본선에서의 승리만 꿈꾸는 것은 공부도 하지 않고 볼펜 굴려 찍어서 시험에서 만점 받기를 바라는 것과 매한가지다. 이건 오만을 넘어 만용이며, 만용을 넘어 정치적 자해행위다.

25평짜리 아파트 분양을 신청하기 위해 꼭두새벽부터 줄을 서야 하는 나라의 정치 지도자로서 105평짜리 빌라에 거주하는 것을 본인 스스로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것은 국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등록금 100만원이 없어 휴학을 해야 하는 학생들이 즐비한 현실에서 일국의 대통령 후보 아들의 해외유학 비용을 둘러싼 정치적 논란이 분분한 것은 액수의 다과를 따지기에 앞서 아이들 과외비와 학원비에 등허리가 휘어지는 서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을 자아내기 마련이다.

측근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백주대낮에 남의 당 당적의 도지사에게 탈당을 종용하는 것은 3김씨조차 생각하지 못했던 정치적 폭거이다. 여지껏 JP가 그처럼 대노한 것을 본 적이 없다. 에두르지 않은 직설화법으로 특정인의 정치적 의도를 기필코 좌절시키겠다고 결연히 다짐하는 것도 이전에는 목격된 바 없다.

JP의 분노를 임계점에 이르게 한 이번 사단의 원인을 제공한 이들은 한결같이 이회창 총재의 측근으로 당내외에서 지목되고 있는 인물들이다. 이총재가 대세론에 도취되기 시작할 무렵부터 당내에서 그를 둘러싼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5~6공 시절 잘나갔던 과거 민정계 출신들이 주류를 이룬다. 이들 구정치인들에 의지해 인터넷과 21세기로 상징되는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비전이나 화두가 나올 수 있을지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이총재의 나이도 오래전에 이순(耳順)을 넘어 어느덧 고희(古稀)를 바라보게 되었다. 세계 각국이 젊고 활기찬 리더십으로 미래를 준비하는 이때, 그가 시대의 조류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면서 거친 풍랑이 일렁이는 망망대해 속에서 한국호를 움직이는 조타수 노릇을 잘 해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세대교체의 돌풍에 더하여, 평민 대 귀족의 싸움이라는 전선까지 형성된다면 이총재에게는 그야말로 악몽이 따로 없을 것이다. 젊음과 패기로 무장한 영남출신 고졸자와, 대한민국 전체가 자기 고향이라고 주장하는 아날로그형 엘리트가 펼치는 흥미진지한 대격전.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말처럼 지금의 추세대로라면 이회창 총재의 필패는 불을 보듯 훤하다. 가회동 빌라의 한숨소리가 절로 높아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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