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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보은 / "박근혜를 찍어야 진보"라는 말을 한적이 없다
 
대자보   기사입력  2002/03/19 [17:16]
최보은 / 내가 박근혜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유

두해전, 한 칼럼에서 ‘출마한다면 박근혜 의원(이후 호칭 생략)을 찍겠다’고 공언할 때까지만 해도, 그것은 여성정치 참여현실의 참을 수 없는 후진성에 대한 역설적, 반어법적 수사였다. ‘박근혜’의 정치적 기반 뒤에 독재자에 대한 퇴영적 향수, 지역주의의 정서가 숨어 있다는 것을,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왜 모르겠는가. 그 글이 나가고 얼마 뒤, <여성신문>에는 여성 정치인으로서의 박근혜가 왜 페미니스트에게 ‘달콤한 유혹’일 수밖에 없는지, 그런 선택이 왜 위험한지를 지적하는 설득력 있는 칼럼이 실리기도 했다. 그 때는, 아니 그게 현실의 극악함을 강조하기 위한 반어법이라는 걸 모른단 말인가? 하는 심정으로 넘어갔다.

박근혜가 구체적 화두로 다가온 것은, 그가 한나라당 대선후보 당내경선 주자로 나선 뒤였다. 그 전부터 이 땅에서 여성의 참정권 행사는 어때야 하는가에 대해, 철학적 고민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유권자가 된 뒤 두 번의 대선에서 똑같이 김대중씨를 찍었고, 총선 때마다 제1야당 후보를 찍었던, 그 전의 투표행위가 과연 내 이익에 부합되는 것인지에 대한 반성적 성찰 때문이었다. 지난번 대선 때만 해도, 진보정당에 투표해 표를 분산시키는 젊은 후배들을 꾸짖고 야단칠 정도로 확신이 있었는데, 현실정치를 지켜보면서 묘하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사표를 방지해야 한다, 힘을 모아야 한다, 우선 급한 적을 따돌려야 한다, 이런 논리가 개인의 신념이나 원칙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방기하게 하는, 그리하여 결국엔 철학부재의 집단논리로 ‘자기 이해의 반영’이라는 개인 참정권 행사의 기본원칙을 묵살하게 하는 데 대한 연막은 아니었던가? 더군다나, ‘일상의 파시즘’론이나 여러 논의를 통해, 진보진영도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나 전체주의적 집단 의식과 권위주의, 성차별 행태 면에서는 주류사회의 그것을 거울처럼 반영한다는 사실을 알고난 뒤에도, 여성진영은 왜 참정권 행사를 여성 독자의 이해관계에 기반해서 바라보지 않고 ‘진보진영’의 틀 속에서만 바라보려 하는가? 하는 의문이 든 것이다.

내가 그런 의문을 제기하자 어느 진보주의자는 답답하다는 듯이, “아니 그럼 김대중씨가 대통령이 되는 것과 이회창씨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그렇게 아무 차이도 아니란 말이요? 노무현씨가 대통령 되는 것과 이회창씨가 대통령 되는 게 그렇게도 같다는 말이요?”라고 탄식했다. 말했지만 나는 바보가 아니다. 김대중 정권하에서 여성특위가 발족했고, 여성부가 탄생했고, 여성쿼터제가 실시됐다. 역대 정권중 여성정책에 관한 한 가장 선진적이었고, 그것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여성 스스로의 각성과 고양에 의한 투쟁에 의해 쟁취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물론 각 차원에서 간단없이 여성에 의한 여성운동이 계속되고 있긴 하지만, ‘지도자의 적극성’이 없었다면 이렇게 단기간에 이 정도의 수확을 거둬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 90%는 한 각성된 정치지도자에 의해 ‘시혜적으로 주어진’ 과실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건 지도자가 바뀌면 한 순간에 ‘물려질 수도 있는 것’이다. 금융실명제와 관련한 법안들이 정권의 이해에 따라 일거에 실종됐듯이 말이다.

교복을 폐지한 것이 ‘위로부터의 결정이었기 때문’에 생각 다른 지도자가 들어섰을 때 교복은 부활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정권에서 주어진 ‘획기적인 조치’들이 여성 스스로의 정치의식을 고양시키는데, 여성을 정치적으로 훈련시키는 데 유의미한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니, 정권이 바뀌었을 때 그것을 지켜낼 수 있을지가 자신이 없는 것이다. 여성은 스스로 정치세력화돼야 한다. 어떤 면에서는, 만약 이 땅에서 여성들이 참정권 행사를 위해서 피를 흘려야 했다면, 여성들의 정치의식이 지금처럼 열악하지는 않을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그리고 이왕 거저 주어진 참정권이니 양성평등을 위해서 최대한 적극적으로 행사하자, 그게 ‘공짜 점심’의 독에 대한 해독제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사실 여성을 정치세력화하는 데 ‘참정권 행사’ 만큼 직접적이고 좋은 기회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나는 여전히 ‘특정 진영’에 종속된 투표행위를 하는 것이 여성의 정치세력화에 최선의 방법인지를, 여성의 이해에 최대한 부합하는 것인지를, 아니 특정 진영을 떠나 개인적으로 남성후보가 마음에 들더라도 전략적으로 여성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것이 (일시적으로) 더 적극적인 여성참정 방법은 아닌지를, 고민중인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박근혜에 대해서 ‘독재자의 딸’이라는 사실밖에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음을, 아니 알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음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왜곡된 언론 환경 탓에 끝없는 착시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경계와 자각은 내게 ‘박근혜’에 입혀진 여러 가지 이미지의 옷을 비판적으로 성찰적으로 바라보는 데 유용한 계기였다. 언론은 남성에 의해 장악되어 있고, 그 언론은 박근혜가 정치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현실적 파괴력에 비해 그에 대한 대접을 의도적으로 혹은 미필적으로 소홀히 하고 있다는 판단이다. 이것은 내가 존경하는 강준만 교수의 눈에조차 포착되지 않는, 소수자 여성의 눈으로서만 봐낼 수 있는 지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일단 박근혜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바라보기 시작하자, 여러 가지 모순된 현실이 난반사됐다. 그리고 온갖 의문이 내게 더 철학할 것을 강요했다. ‘가부장적인 진보’ 후보가 ‘가부장적인 보수’ 후보보다 나은 것은 사실이지만, ‘독립적인 여성후보’보다 더 나은 것인가? 아니 일부 남성후보가 ‘적극적 양성평등 의식을 가진 진보’라고 인정한다 하더라도, ‘태생적 소수자’인 여성후보보다 나은 것인가? 박근혜에게는 과연 ‘독재자의 딸’이라는 정체성 밖에는 없는 것인가? 물론 ‘독재자의 딸’이라는 건, 진보주의자로서건 여성주의자로서건 표를 던지기엔 치명적으로 꺼림칙한 조건이다.

그러나 그런 ‘후광’의 치명적 위험함으로부터 자유로운 후보가 과연 있는가? 온갖 학연, 지연, 혈연으로 무장한 남성후보들은 그렇다면 ‘학교의 아들’ ‘고향의 아들’ ‘가문의 아들’은 아니던가? 김대중 대통령은 그렇다면 ‘호남의 아들’은 아니었던가? 왜 진보주의자들은 지역정서를 끝없이 개탄하면서 지역정서를 표밭으로 업고갈 수 밖에 없는 것을 ‘현실정치의 한계’라고 간단히 체념해버리고 말았던 것인가? ‘독재자의 딸’이라는 후광이라도 업어야 한다는 논리는, 그 앞에서 얼마만큼 열등한 위치인가? 아니 정말 연좌제가 합법화된 사회 아닌 다음에야, ‘독재자의 딸=독재자’라는 등식이 없는 다음에야, 적어도 한 독립된 정치인으로서의 냉정한 검증이 앞서야 하는 것 아닌가? 정치적 기반의 ‘전근대성’으로 말할 것 같으면, 도대체 그 누가 자유롭다는 말인가? 지금 민주당에서 당내 경선에 출마한 거의 모든 후보가 ‘정치적 아버지’가 있지 않은가? 나도 안다. ‘진보진영’이라는 그야말로 훌륭하고 떳떳한 ‘집단적 지지세력’을 확보한 후보도 있다는 걸.

그러나, 아니 그렇다면 말이다. 만약에 박근혜가 아니라 그 어떤 여성후보라도, 지금 이 땅에서 어떤 집단적 지지세력을 가질 수 있는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안찍는 사람은 많아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찍을 사람은 극소수인 이 땅에서? 아니, 여성주의적 관점에 입각해서 ‘여성 후보’를 찍을 가능성이 있는 그 극소수의 여성도 대부분 ‘진보진영’에 ‘열등한 위치’로 편입돼 있는 이 땅에서, 말이다. 여기서, 이 땅의 여성운동을 그토록 어렵게 만든 ‘우선순위’의 문제가 앞을 가로막는다. 자, 여성계가 진보진영과 분리된 독자적 투표행위를 할 수 있을 시점은 언제 올 것인가? 물론 진보진영 전체가 자신의 가부장적 실체를 반성하고 ‘여성 지도자’의 조력자가 될 날이 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이미경 의원이나 추미애 의원이 ‘수컷들의 세상’인 정치판에서 온전히 자신만의 역량으로 정치기반을 다져서 후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때조차도, 그들보다 (오로지 구조적 프리미엄 덕분에) 훨씬 더 한 정치적 경륜과 식견으로 무장한, 훨씬 더 탄탄한 정치 기반을 가진 ‘진보적 남성 후보’들이 언제나 ‘우선순위’에서 앞일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가능성을 믿고 때를 무한정 기다리기에는, 여성의 현실이 너무나 절박하지 않은가. 여성의 정당한 권력획득, 정치계에서의 합당한 지분확보가 1년 지연될 때, 그 1년동안 성차별 현실에서 희생 당하는 여성의 수를 생각해보라. 말 그대로 고스란히 한 세대의 절반인 여성이 불이익을 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가한 입장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한발 물러나 보더라도, 지금 ‘박근혜’를 훨씬 더 치열한 토론과 관심의 담금질 앞에 두어야 그 뒷세대 정치인인 이미경, 추미애 의원도 그에 합당한 주목을 받을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기대받는 만큼 그 존재가 더 자라고 커지지 않겠는가. 평소 ‘여성 정치인’이라는 딱지를 거부해온 추미애 의원은 ‘취중발언’ 사건을 통해 자신의 의지나 정치적 포지셔닝이 남성지배 언론에 의해 얼마나 값싸게 취급 당하는지를, 자신의 정치철학이나 정치역량과 상관없이 그들의 눈에 자신은 언제나 ‘여성 정치인’일 뿐임을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이쯤에서 아무래도 앞서 얘기한 여성신문의 그 칼럼을 좀 길게 인용해야겠다.
“아시아에서 딸들이 아들들보다 쉽게 아버지의 후광으로 권좌에 오르는 것은 아주 지독한 남근중심주의가 일상의 켜켜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것은 여성마저 최고 권좌에 올릴 수 있는 괴력을 과시하는 동시에 여성을 개별자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지독하다. 딸은, 여성은 한 인간으로서의 독립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절대권력자로,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남성성의 화신이었던 아버지의 전설을 상기시키는 ‘아버지의 딸’로 남을 수 있다.

다시 말해 권력자의 신화와 전설이 아버지에게 종속되는 것을 거부하지 않는 딸들을 통해 부활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들은, 남성은 애초부터 독립된 개별자이기에 아버지의 아들로만 남을 수 없다. 아들은 그 자신의 욕망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외디푸스처럼 아버지를 딛고 한 사람의 남자가 되려 한다. 대통령의 아들들이 딸들과 달리 그들의 야심을 부단히 의심받고 비난받는 것은 그 때문이다. DJ의 장남 김홍일 의원 그리고 YS의 차남 김현철은 그러한 아들에 대한 반감과 의심때문에 ‘비선’에서 활약했다. 딸들처럼 전면에 나설 수 없는 것이다. 아버지의 후광을 입은 박근혜의 대권도전은 그래서 너무도 가부장적이고 지독히도 남근주의적인 질서를 교묘히 재생산하는, 그러면서 이 땅의 여성들과 일부 페미니스트들을 잠시 혼돈에 빠뜨리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다. ”

그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의 다는 아니다. 그런 측면이 있다는 이유로, ‘권력자의 딸이 정치를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오히려, 나는 위의 칼럼조차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에다 딸들을 개별자로 인정하지 않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정치판 전체가 구조적으로 전근대적인 우리나라에서 그런 논리는 오히려 일시적으로 ‘남근주의를 경계하려다 남근주의에 미필적으로 봉사하는 결과’를 낳을 수있다고까지 생각한다. 국민적 추앙을 받았던 네루 수상의 딸 인디라 간디는 수상직에 오른 뒤 ‘여성억압적 정치’를 펼쳤지만, 가부장적 지도자 부토의 딸 베나지르 부토는 ‘여성친화적 정치인’이었다. ‘빵집 딸’인 대처는 알고보면 ‘무늬만 여자’였다. 그리고 위의 글이 간과한 게 또 있다. 대통령의 아들들은 뱃지를 달건 달지 않았건 정치인 위에 군림하는 ‘새끼 통치자’로서 막강한 권력을 막후에서 행사했다. 박근혜가 뱃지를 달기 전이나 단 이후에, 그 만한 권력의 10분지 1이라도 행사했던가? 아니, 한번이라도 ‘이유없는 권력’을 행사한 적이 있었던가? 최소한 정치인으로서의 검증은 다른 후보들이 ‘당하는’ 만큼 철저히 당하게 해야 옳지 않겠는가? 내가 이제부터 ‘청문’하고 ‘감시’하려고 하는 게 그 대목이다. 그 전까지의 과정이 생략됐다는 말을 나는 하고 싶은 거다.

왜 언론들은 비록 당내이긴 하지만, 헌정사상 최초로 ‘대권’에 도전한 여성 정치인에 대해 합당한 관심을 할애하지 않는가? 왜 각국 여성지도자, 특히 대를 이어 정치한 여성 지도자들의 정보를 쏟아내지 않는가? 왜 조지 부시나 힐러리 등의 ‘정치적 지위 승계’를 우리의 그것, 동남 아시아의 그것과 비교하지 않는가? 나는 지난해 남북화해 무드로 떠들썩할 때, 김대중 대통령의 평양방문을 동행취재하고 돌아온 기자들이 김정일에 대해 ‘날 때부터 제왕수업을 받았던 인물’이며, ‘그 제왕수업은 돈으로 살 수 없는 정치적 자산’이라고 평가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왜 그런 논리는 박근혜에게 적용되지 않는가?

‘관찰하는 행위는 관찰되는 대상을 변화시킨다’고 한다. 나는 언론이 박근혜를 바라보는 틀이 이회창, 노무현, 이인제와 같은 다른 남성 정치인들을 묘사하는 틀과는 분명히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른 여성 정치인들에 비하면 ‘그 기반’을 의식해서인지 비교적 호의적이긴 했지만, ‘대권 도전’과 같은 결정적인 시점에 다다르면 그 실체가 드러난다. 보수는 보수대로 자신들이 그토록 독재자 향수를 부추겼다는 사실을 모른다는듯이 정치인 박근혜의 존재를 조용히 묵살하고, 진보언론은 ‘박근혜=박정희’의 등식을 기정사실화한다. 박정희 향수가 그토록 위험하다면 왜 언론들은 박정희 기념사업에 대해서 흥분하지 않았는가? 아니면 적당히 흥분했는가? 보수언론은 심정적으로 동조하기 때문에, 또 진보언론은 그것이 상대적 진보인 소수정권의 ‘불가피한 전략’임을 이해하기 때문에, 서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일 것이다.

지난달, 박근혜가 언론에 집을 공개했을 때, 모든 언론이 한결같이 여성지에나 어울릴 ‘스케치성 기사’로 조그맣게 취급하고 넘어가는 것을 보고 나는 놀랐다. 제1야당의 당내 대권주자 후보경선 유력주자가 집을 공개했는데, 그 숨은 뜻에 대해서 그토록 나몰라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지나치면 넘치는 ‘계영배’를 기자들에게 선물했다는데, 그게 겨냥한 대상에 대해 언급한 언론은 고작 한두군데였다. 보수언론이나 진보언론이나, 결론은 똑같다. 정치인으로서의 박근혜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는 대목에서 말이다.

나는 ‘잠재적 대권후보 박근혜’를 둘러싼 지금의 고요가 싫다. 그래서 한바탕 소란을 일으킬 작정이다. 소란 통에 온갖 말이 쏟아질 것이고, 거기서 내가 배워야 할 것과 버려야 할 생각이 가려질 것이며, 보수와 진보의 입장 차이가 드러날 것이며, 일부 위장된 진보의 실체도 볼 수 있을 것이며, 박근혜도 여성의 생각을 배우고 여성의 기대를 두렵게 의식할 것이기에. 나는 그런 뒤에 과연 어느 후보에 찍을 것인가를 다시 한번 깊이깊이 생각할 것이다. 그래야만 내가 딸들의 세대를 위해 먼저 산 여성으로서 한표를 헛되이 행사하지 않았다는 자부심을 얻게 될 것이다.

* 본문은 최보은씨가 여성문화동인 살류쥬( http://www.salluju.pe.kr ) 게시판에 '기사'가 아닌 '게시물'로 올린 비공식적 문건입니다. 다만 본지의 기획기사인 '박근혜논쟁 관련' 자료로만 올릴것이니 무단전재 등은 삼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래는 최보은씨가 살류쥬에 올린 글 전문입니다.

<말>지 기사 공방과 관련한 최보은 생각    
올린이 : 최보은

살류쥬 회원 여러분, 안녕하세요.
저는 그 말많고 말썽많은
최보은이라는 여자입니다.
아랫글은 제가 <말>지와 인터뷰에 임하면서
제 생각을 정리하여 <말>지 기자에게
인터뷰에 참고하라고 넘겨준 글인데요.
혹시 참고가 되실까 하여 여기에 올려놓습니다.
참고로 <말>지 기사를 읽어보시면 알겠지만
저는 "박근혜를 찍어야 진보"라는 말은
한적이 없습니다.
다만 잡지가 제목장사를 하는 일은
다반사이므로,
더군다나 <말>지가 저를 팔아 장사하는 일에
별로 반대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일언반구 항의하지 않고 넘어갔습니다.

최보은 / 내가 박근혜를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이유

..... 이하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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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2/03/19 [17:16]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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