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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초 한글로 교과서 쓴 호머 헐버트의 혁명
[한글 살리고 빛내기3] 한글과 세종이 얼마나 훌륭한지를 영문으로 세계에 알려
 
리대로   기사입력  2020/06/29 [00:00]

조선시대 배움터는 교육기관은 향교와 성균관이었는데 거기서 배우고 읽는 글은 중국 한문이었다. 천자문을 시작으로 한자를 배워서 수 천 년 전에 중국 공자와 맹자 같은 이들의 가르침을 적은 한문을 읽는 것이 배움이었다. 1446년 세종이 우리 글자인 훈민정음(한글)을 만들었지만 450년이 지난 조선 말기까지도 이 한글로 말글살이를 하고 교육을 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1886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고종이 세운 서양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교사로 온 미국인 청년 호머 헐버트가 우리 한글을 배워 3년 만에 사민필지란 세계 사회지리 교과서를 한글로 써서 1890부터 교과서로 사용했다. 이 일은 우리 교육과 우리 말글살이 혁명(판갈이)이었고 한글을 빛내는 큰 빛이었다.

 

그 전에 서양 기독교가 중국에 들어가서 그 성경을 한자로 썼으나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에 선교사들은 이 땅에 한자보다 더 좋은 한글이 있는 것을 보고 성경을 한글로 썼다. 그러나 교과서를 한글로 쓴 것은 세계에서 이 책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이 그랬다는 것은 매우 놀랍고 고마운 일이었다. ‘사민필지선비()와 백성{)이 꼭(} 알아()야 할 지식이라는 한문 이름이지만 그 책 겉장에 쓴 책 이름은 한글로 썼다. 그는 그 책 머리글에서 오늘날은 세계가 서로 오가니 다른 나라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칠, 팔세가 되면 제 말글을 먼저 배우고 제 말글로 세계 사회지리를 배우는데 조선은 중국 글자를 먼저 배우고 한문이나 읽고 있어 안타깝다.”며 한글로 이 책을 쓴 것이었다.

  

▲ 왼쪽은 헐버트가 1891년 한글로 쓴 사민필지, 오른쪽은 대한제국 때 한문으로 쓴 교과서     © 리대로


그는 조선 글은 중국 한자보다 배우고 쓰기 쉽기에 아직 조선 말글이 서툴지만 조선 사람 누구나 읽기 쉽게 하려고 조선 말글로 쓴다.”라고 했다. 그는 한글을 배운 지 4일 만에 한글을 깨우치고 일주일 만에 조선인이 한글을 무시하는 것을 깨달았으니 한글이 좋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우리 말글로 그 책을 쓴 것이었다. 그는 미국에서 대학을 다녔으며 한국에 오기 전에 여러 나라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니 언어학을 아는 이로서 한글이 좋은 글자이며 이 글자를 만든 세종이 대단히 훌륭한 분임을 바로 알았고 이런 글자를 만든 겨레라면 이 제 말글로 교육만 잘하면 이 겨레도 잘 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와 겨레를 사랑하게 되었고 한글과 교육을 통해서 일어나게 하려고 나선 것이다.

 

그 때 조선인들이 향교나 성균관에서 배우고 읽는 책은 중국 사서삼경 한문책이었는데 그가 한글로 책을 쓴 것은 개혁을 넘어서 혁명이었다. 조선 학자나 지도자들은 한문으로 생각하고 글을 쓰고 말글살이를 했기에 한글이 한자보다 얼마나 훌륭한 글자이고 한글을 쓰는 것이 왜 좋은지 생각지도 못했지만 서양에서 대학까지 나오고 여러 나라 말을 익힌 사람의 순수한 눈으로 한자와 한글, 두 글자를 견주어 보니 조선 사람은 한글로 말글살이를 하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그리고 그 깨달음으로 끝나지 않고 한글을 이용하는 것을 실천했다. 그 때 조선은 중국과 일본은 말할 것이 없고 서구 열강이 넘보고 있어서 나라가 매우 흔들리고 있었는데 그는 조선인이 제 말글로 교육하고 말글살이를 하면 중국, 일본보다 더 잘 사는 나라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실천한 것이다.

 

그가 일한 육영공원은 이 나라를 이끄는 젊은 관리와 왕족이나 양반 자녀를 교육하는 기관으로서 초급 관리인 이완용도 거기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그 때는 세계가 서로 많이 오가며 외국과 교섭도 하고 경쟁을 하는 시대인데 조선은 세계 사회지리 공부는 안하고 수십 년 동안 중국 한문 공부만 하고, 그 한문 실력을 가지고 관리를 뽑고 그들이 외국과 외교 활동을 하는 것을 봤다. 그러니 세계 사정을 모르고 상대 나라가 국력이 얼마나 되며 어떤 나라인지 알지도 못하고 교섭을 하니 외교를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다른 나라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 어떤 것보다도 먼저 한글로 세계 사회지리 책을 쓴 것이다.

 

그는 육영공원 교사로 와서 젊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고종에게도 영어를 가르치고 고종의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1891년 육영공원 교사 계약기간이 끝나서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미국의 한 대학 총장직을 맡으라는 것을 거절하고 스스로 감리교 선교사로 다시 한국에 왔다. 한국의 가능성을 보았고 이 나라를 좋아하게 되니 스스로 이 나라를 위해서 할 일이 많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감리교 선교사로 와서 배재학당 안에 있는 감리교의 삼문출판사 책임자로 일하면서 배재학당에서 서재필과 학생들도 가르쳤다. 그 때 배재학당 학생인 주시경을 그 출판사 사환으로 썼으며, 서재필과 1896년에 독립신문을 만들 때에도 주시경을 한글판을 책임지는 조필로 일하게 했다.

 

이때 한글에 관심이 많은 주시경이 헐버트를 만나고 함께 일을 하게 된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었다. 주시경은 독립신문사에서 일하면서 그 신문사 안에 국문동식회(한글맞춤법연구회)’를 만들고 한글을 연구했는데 그 때 헐버트에게 언어학과 문법에 대해서 물었을 것이고 한글과 조선 젊은이를 사랑하는 헐버트는 자신이 아는 것을 아낌없이 알려주었을 것이다. 그러니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 이상으로 친분이 두터워지고 한글 동지가 되었을 것이다. 그 때 헐버트는 벌써 한글로 사민필지란 책도 썼으며, 한글을 연구하고 영문으로 한글과 세종이 얼마나 훌륭한지 논문과 글을 써서 외국인에게 알려주고 미국 신문에 투고를 했다. 주시경은 그 때 최고 한글학자로 성장했고 헐버트와 함께 정부 안에 국문연구소 설립도 건의하고 1908년에 최초 민간 학회인 국어연구학회(한글학회)도 만들게 된다.

 

헐버트는 한글학자요 조선 독립 운동가이며 언론인이었고 역사학자였는데 그 무었보다 교육자로 많은 일을 했다. 처음에 육영공원 교사로 일을 했고, 배재학당에서도 학생들을 가르쳤고, 1897년 관립 한성학교 교장과 선생으로서 젊은이 교육에 힘을 쓰고 관립중학교 교사로도 활동하면서 한글로 우리 역사책을 쓰고 다른 교과서들도 연속 기획물로 내는 일을 하면서 우리 교육 틀을 잡았다. 조선은 청년 교육을 잘하면 일어날 수 있다고 보고 기독청년회도 만들었고 1905년 을사늑약 뒤에는 고종을 도와 우리 독립운동에 나선다. 고종 특사로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알리고,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이위종 밀사를 데리고 간다. 그런 그를 일본이 그대로 두지 않고 조선에서 추방했으나 미국에 가서도 서재필, 이승만, 안창호 들 조선인들과 죽을 때까지 조선 독립운동을 했다.

 

그 때 그가 그렇게 이 나라를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한 것은 인류 누구나 고루 사랑하는 박애정신을 가진 참 사람이었고 참 기독교인으로 그 정신을 실천한 것이라고 본다. 그는 청년 때부터 일생동안 우리 독립운동을 했기에 대한민국 건국 뒤 1949년 우리 광복절 기념식 참석을 초청받고 오기 전에 AP통신 기자가 86세 늙은 몸으로 한국에 가는 것이 어렵지 않겠느냐고 물으니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히는 것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한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때 미국 스프링필드유니언지에 실린 인터뷰에서도 한국인은 가장 완벽한 문자인 한글을 발명했고, 임진왜란 때 거북선으로 일본군을 격파해 세계 해군역사를 빛냈으며, 조선왕조실록 같이 철저한 기록 문화를 지니고 있다고 한국을 칭찬했다. 이 모두 한국을 한국인보다 더 사랑한 사람이란 증거다.

 

그런 그가 그 무더운 여름 한 달이나 넘게 배를 타고 오다가 지쳐 이 땅에 오자마자 바로 병원에 입원했고 광복절 경축식에 참석하지 못하고 1주일 만에 숨을 거두어 마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힌다. 이제 우리는 그를 고마워하면서 그가 바라는 한글나라를 이루어야겠다. 나는 그가 쓴 사민필지 서문을 읽고 한국인으로서 부끄럽고 고마운 마음이 듣고 그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어야겠다고 다짐했기에 아래에 사민필지 서문을 옮기니 한국인 모두 꼭 읽고 한글을 사랑하하고 빛내는 일을 나와 같이 해주면 좋겠다.

 

▲ 헐버트가 1891년 출판한 교과서인 ‘사민필지’ 겉장과 한자를 하나도 쓰지 않고 한글로 쓴 머리글     © 리대로

 

사민필지

 

천하 형세가 옛날과 지금이 크게 같지 아니하여 전에는 각국이 각각 본 지방을 지키고 본국 풍속만 따르더니 지금은 그러하지 아니하여 천하만국이 언약을 서로 믿고 사람과 물건과 풍속이 서로 통하기를 마치 한집안과 같으니 이는 지금 천하 형세의 고치지 못할 일이라.

 

이 고치지 못할 일이 있는 즉 각국이 전과 같이 본국 글자와 사적만 공부함으로는 천하각국 풍습을 어찌 알며 알지 못하면 서로 교접하는 사이에 마땅치 못하고 인정을 통함에 거리낌이 있을 것이오. 거리낌이 있으면 정의가 서로 두덮지 못할지니 그런 즉 불가불 이전에 공부하던 학업 외에 각국 이름, 지방, 폭원, 산천, 산야, 국경, 국세, 재화, 군사, 풍속, 학업과 도학이 어떠한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런고로 대저 각국은 남녀를 막론하고 칠, 팔세가 되면 천하 각국 지도와 풍속을 가르친 후에 다른 공부를 시작하니 천하의 산천, 수륙과 각국 풍속,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는지라 조선도 불가불 이와 갖게 한 연후에야 외국 교접에 거리낌이 없을 것이요. 또 생각건대 중국글자로는 모든 사람이 빨리 알며 널리 볼 수가 없고 조선 언문은 본국 글일뿐더러 선비와 백성과 남녀가 널리 보고 알기 쉬우니.

 

슬프다. 조선 언문이 중국 글자에 비하여 크게 요긴하건마는 사람들이 요긴한 줄도 알지 아니하고 오히려 업신여기니 어찌 아깝지 아니하리오. 이러므로 한 외국인이 조선말과 언문법에 익숙지 못한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잊어버리고 특별히 언문으로서 천하각국 지도와 목견한 풍기를 대강 기록한다. 땅덩이와 풍우박뢰의 어떠함을 먼저 차례로 각국을 말씀하니 자세히 보시면 각국 일을 대충은 알 것이요. 또 외국 교접에 적이 긴요하게 될 듯하니 말씀의 잘못됨과 언문의 서투른 것은 용서하시고 이야기만 보시기를 그윽이 바라옵나이다.

 

조선 육영공원 교사 헐버트 씀


<대자보> 고문
대학생때부터 농촌운동과 국어운동에 앞장서 왔으며
지금은 우리말글 살리기 운동에 힘쓰고 있다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공동대표

한국어인공지능학회 회장

한글이름짓기연구소 소장
세종대왕나신곳찾기모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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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0/06/29 [00:00]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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