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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회관은 한글을 지키는 큰 버팀목
[한글 살리고 빛내기34] 국민 성금과 정부 도움으로 새 한글회관을 짓다
 
리대로   기사입력  2021/08/03 [23:33]

정부가 1970년부터 신문까지도 한글전용을 하겠다고 해서 좋아했으나 일본처럼 한자혼용을 하자는 일본 식민지 교육세대가 들고 일어나 한글전용을 반대하는 바람에 그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오히려 광복 뒤부터 우리말을 살려서 쓰던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일본 한자말이 늘어난다. 한글학회는 이렇게 일본식 한자말을 한자로 쓰자는 이들과 맞서 싸우느라 힘이 든데 일제 강점기에 만든 사전을 더 고치고 낱말을 보태는 일을 시작해서 회관이 낡고 비좁아 매우 불편했다. 일제 강점기 나무로 지은 주택인데 2층으로 오르는 나무 계단은 삐걱거리고 우리 국어운동학생회 회원들 몇 명이 모일 곳도 없어서 학생들은 광화문 앞 시민회관 지하 다방에서 만나야 했었다. 그래서 국민성금을 모아 다시 짓기로 하고 한글회관건립위원회(회장 이은상)를 꾸렸다. 

 

▲ 1970년부터 신문도 한글로 만들기(왼쪽)로 했으나 물거품이 되었고 한글회관(오른쪽)이 나무로 지은 적산가옥 주택이라 비좁고 매우 불편해서 국민성금을 모아 다시 짓기로 했다.     © 리대로

 

새 회관은 지하 2층 지상 5층으로 짓기로 했는데 처음에 돈이 없으니 지상 2층으로 먼저 짓고 다음에 5층으로 올리기로 설계했다. 그리고 처음에 초대 법무부장관을 지낸 애산 이인 선생이 집을 팔아서 3000만 원을 내놓고 학회 회원들과 시민, 학생들까지도 성금을 냈으나 힘이 들었다. 그래서 이은상 선생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그런 어려움을 이야기하고 정부에서 도와줄 것을 건의했다. 그때 이은상 선생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이인 선생이 집까지 팔아서 3천만 원을 내놓았다.”며 정부에서 지원해 주길 건의하니 박 대통령은 그 영감은 방위성금은 안 내고 한글회관을 짓는 데는 집까지 팔아서 내다니 놀랍다.”면서 1억 원을 지원해주어서 5층까지 올리게 되었다. 이인 선생과 이은상 선생이 아니었으면 새 회관을 쉽게 짓지 못했을 것이다.

 

▲ 1976년 애산 선생이 3000만 원을 내놓은데 힘입어 우선 한글회관을 2층까지 짓기로 했다는 한글새소식(왼쪽)과 박 대통령 맏따님인 박근혜 아가씨가 성금을 냈다는 한글새소식(오른쪽)     © 리대로

 

 

정부가 한글전용 정책을 시행하게 만드는 데도 이은상 선생이 박정희 대통령을 설득해서 이룬 일인데 한글회관을 지을 때에도 이은상 선생이 정부 지원금을 받아냈다. 이때에 한글회관을 짓게 되어 그 뒤 거기서 월세를 받아서 한글학회를 운영하고 한글을 지키고 살리는 일을 할 수 있었다. 새 한글회관은 한글 지키기 버팀목이었다. 일반 국민은 한글학회가 정부 지원을 받는 줄 아는 이가 많은데 일제 때에도 대한민국에서도 정부에서 한 푼도 받지 않고 운영하고 있다. 건국 초기 국어정책을 한글학회가 이끌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국어정책이 잘못되면 한글학회에 항의전화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한글을 못살게 군 학술원은 나라 지원을 받고 학술원 회원까지도 다달이 150만원씩 받는다는데 요즘엔 학회 건물도 낡아 세도 나가지 않아 어려움이 많다.

 

▲ 새로 지은 한글회관(왼쪽) 준공식 때 이은상님이 이인님을 보고 “고맙소! 기쁘지요!”라고 말하는 모습, 한글회관 입구에 있는 주시경상 위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이 쓴 붓글씨 ‘한글회관’     © 리대로

 

위 찍그림에서 새 한글회관 준공식 때에 이인 선생은 의자에 앉아있는데 조선어학회 사건 때에 일본 경찰에 당한 고문 후유증 때문이다. 이인 선생은 내가 조선어학회 사건 때 당한 고문 중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두 다리 사이에 목총을 넣고 비틀어대는 것이다.”라고 말했었고 그 고문으로 다리를 상해서 평생 걷기 힘들었다. 조선어학회사건 때 함흥형무소에서 이윤재, 한징 두 분은 모진 고문과 추위에 돌아가셨고, 이인 선생은 1년 만에 옥에서 풀려났으나 언제 또 잡혀가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경기도 시골 농막에 숨어살다가 광복을 맞았다고 한다. 그런 그가 광복 뒤 미국 군정 때에는 검찰총장도 하고 대한민국 건국 때에는 초대 법무부장관을 지낸 건국 공로자이신데 돌아가신 뒤 후손들은 이인 선생이 살던 집까지 내놓았다. 한글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애국정신 때문이었다. 이인 선생도 훌륭하지만 그 후손도 고마운 분들이다.

 

일제 강점기 조선어학회가 한글맞춤법을 만들고 우리말 말광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은 한글학자들이 애썼지만 그 일을 하도록 이우식, 김도연, 신윤국, 김양수, 김종철, 장현식 선생들이 재정지원을 해주고 이은상, 이인, 김법린, 안호상, 안재홍, 서민호 같은 애국지사들과 많은 분들이 애썼다. 일제 때 조선어학회가 회관이 없어 어려울 때에도 경성에서 한옥 짓는 사업을 하는 정세권 선생이 2층 한옥을 학회에 기증해서 말모이를 만들 수 있었는데 대한민국 때는 이인 선생이 집을 내놓아서 회관을 지을 수 있었고 그 집에서 세를 받아서 계속 한글을 지키고 살리는 일을 할 수 있었다. 광복 뒤에 돈이 없어 말광을 내기 힘들 때에 안과의사 공병우박사는 안성 땅 수만 평을 학회에 기증하기도 했다. 

 

▲ 일제 때에 종로구 화동 한옥마을에 조선어학회 회관을 기증한 정세권(오른쪽)님과 그 터 표지.     © 리대로


오늘날 대한민국 재벌들이나 우리 말글로 돈을 버는 언론이나 기업들은 한글운동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한글을 못살게 구는데 일제 강점기 돈 많은 분들은 그렇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 종로구 화동에 조선어학회에 2층 한옥을 기증한 정세권 선생은 표준말을 정하는 일도 함께 한 분이고, 이인 선생은 변호사로서 독립운동을 하는 애국지사들과 단체를 무료 변론한 애국지사다. 이은상 선생도 조선어학회 사건 때 고초를 겪었는데 박정희 대통령을 설득해서 한글회관을 짓게 했다. 이 세 분 모두 한글학자는 아니지만 조선어학회 사건 때에 함께 경찰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고초를 겪었다. 오늘날 한글이 이만큼 쓰이기까지 한글학자들이 한글을 갈고 닦아서 될 수 있었지만 한글운동을 한 분들 공로도 그에 못지않게 크다.


<대자보> 고문
대학생때부터 농촌운동과 국어운동에 앞장서 왔으며
지금은 우리말글 살리기 운동에 힘쓰고 있다
우리말살리는겨레모임 공동대표

한국어인공지능학회 회장

한글이름짓기연구소 소장
세종대왕나신곳찾기모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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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21/08/03 [23:33]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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