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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100만보다 지역 1만이 더 소중하다
[정문순 칼럼] 지역민이 생활 공간에서 집회에 참여하는 것이 생활정치의 발전
 
정문순   기사입력  2016/11/23 [19:59]

10만 명이 모인 19일 부산 집회에서 김재하 민주노총 부산본부장이 부산은 위대한 민주화의 도시이다. 박정희, 전두환도 부산 시민의 손으로 끌어내렸다”(오마이뉴스 인용)라고 말한 것은 조금도 과장이 아니다. 부마항쟁은 1972년 유신 선포 이후 부산의 대학가에서 일어난 첫 시위였다. 실제로 유신 이후 5년 동안 부산의 대학가에는 서울 지역 대학가에서 유신을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나 위수령이 발동된 것과 대조적으로 시위가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유신 정권이 막바지 발악이라도 하듯 YH 여성노동자들의 농성을 도왔다는 이유로 김영삼 신민당 총재의 직무를 정지시키는 희대의 탄압을 가한 1979년은 달랐다.
 
부산에서 시작하여 이틀 뒤 마산(지금은 창원에 통합됨)으로 퍼진 이 항쟁은 곧 철옹성과도 같은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는 결정타가 됐다. 최근에야 밝혀졌지만 당시 마산 시위에서 사망자가 나올 정도로 경찰의 진압이 혹독했다. 부마항쟁은 박정희 정권을 크게 긴장시켰다. 항쟁이 일어난 지 정확히 열흘 뒤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가 부마사태를 걱정하자, 경호실장 차지철이 캄보디아 폴포트 정권의 300만 학살을 예로 들며 박정희에게 시민 학살을 종용하는 발언을 했고, 이에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거사를 결심했다고 재판에서 진술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6월 항쟁도 마찬가지다. 흔히 6월 항쟁이라고 하면 명동성당 농성을 상징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항쟁의 중심지를 하나만 꼽으라면 어디까지나 부산이었다. 6월 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한 박종철이 부산 출신인 이유도 있었지만 부산은 3당 합당 이전까지만 해도 오랫동안 전통적인 야권 도시였으며 전두환 정권에 대한 반감도 매우 높았다. 또 이렇다 할 산업기반이 없어 영남권 신공항 유치에 매달리는 오늘의 처지와 달리 당시만 해도 명실상부한 제2의 도시였다. 외부 인구 유입이 활발하고 정보에 개방적이었고 사람들의 정치 인식도 높았다.
 
그로부터 강산이 세 번 바뀐 2016년 오늘, 사회 모든 부문이 그렇듯이 데모조차 서울이 주도하는 세상이 된 것처럼 보인다. 지난 12100만 명을 부른 서울의 박근혜 퇴진 민중총궐기대회는 집권자가 물러나야 할 정당성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근거로 쓰이고 있다. 5%의 박 대통령 지지율이니, 대구경북 민심도 박 대통령으로부터 돌아섰느니 하는 말조차 ‘100만 촛불의 위력 앞에서는 초라하다.
 
그날은 전국 각지의 단체 구성원들이 대거 서울로 결집하면서 지역 경찰의 정보과 형사도 이동할 정도로 서울은 블랙홀과도 같았다. 본행사에 앞서 오후 2시 서울시청 광장에서 사전 집회인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릴 때 이미 이동이 힘들 정도로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시청이나 광화문 일대는 모여드는 인파들로 숨쉬기도 벅찰 지경이 되었다. 이동은커녕 송곳 하나 꽂을 땅이 없다는 표현이 전혀 과장이 아님을 실감했다. 사람 숫자만으로도 그날 집회는 모든 상황을 정리해 버렸다.
 
그러나 지역이라고 해서 그날 마냥 조용했던 것은 아니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촛불은 밤을 밝혔다. 그 이전부터 주말을 포함하여 일주일에 2~3차례 촛불이 켜진 지역들은 12일도 촛불이 꺼지지 않았다. 100만 서울 집회 후에도 새누리당 친박 의원들이 촛불을 과소평가한 것은 언론이 서울 집회만 조명함에 따라 서울에서만 촛불이 타올랐다고 지레 단정했기 때문인지 모른다. 서울 중심적 사고에 사로잡힌 것은 대다수 언론이든, 범죄 피의자 대통령을 떠받들고 있는 친박 의원들이든 마찬가지인 셈이다
 

▲ 자신이 살아가는 일상의 공간이 곧 집회와 시위 현장이 되는 생활정치를 실현할 때다.     ©정문순

지난 19일은 다시 지역별로 촛불을 켜기로 한 날이었다. 서울에서는 70만이 모였다고 한다. 부산의 경우 10만이었고, 내가 사는 도시는 1만 명이라고 나왔다. 시청 앞 원형 잔디밭에 1만 명이 모인 적은 여태껏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몇 년 전 아이돌 가수가 거기서 공연했을 때 모인 숫자가 7천 명이었다고 한다. 이날 전국적인 집회 참가 인원은 12일의 서울 100만 시위를 넘었다.
 
이날 집회는 시민 자유발언 신청자가 몰려 주최 측이 차단해야 했다. 마이크를 잡은 발언자들도 하나같이 정곡을 찌르는 발언과 재치 있는 입담으로 사람들을 열광시켰다. 집회 초반은 명망 있는 운동가들이 차례로 마이크를 잡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판만 깔아놓으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연단에 모여들어 너도나도 마이크를 달라고 요구했다. 특히 청소년들의 말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한 고등학생은 집회를 마치고 따로 토론 판을 벌이자고 또래들에게 제안하기도 했다. 집회가 비폭력 프레임에 갇혀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면서 박수를 받은 고등학생도 있었다.
 
또 연단에 오른 한 남성은 비선 실세인 아내가 써준 글을 대독했는데, 얼굴에 금실을 넣어 잡아당기는 수술을 하는 것이 대통령의 일이냐며 성형 시술에 중독된 국민의 대표를 재치있게 풍자하였다. 시민들의 말은 어떤 정치전문가보다 통찰력이 뛰어났고 어떤 개그맨보다 입담이 뛰어났다. 다음날 확인해 보니, 시민들의 발언은 고스란히 취재 기자들의 기사에 담겨 있었다.
 
사회자가 집회 종료를 선언했음에도 판은 마무리되지 않았고 여운은 길었다. 모금함에 들어온 시민 성금도 700만원이 넘었다. 유모차를 끌고 온 가족 단위 시위자들도 많았고 한 아빠는 거리 행진 도중 어린 자식에게 대통령이 자기랑 친한 사람들에게만 도움을 줬다며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쉽게 풀이해 주기도 했다.
 
지역이 마련한 집회는 시민들의 실생활과 결합한다. 퇴근 길에 들를 수도 있고, 쿨쿨 자는 아이를 업고 나올 수도 있으며, 오래간만의 가족 나들이가 될 수도 있다. 사람들이 붐비는 행사가 그저 궁금해서 올 수도 있다. 집에 가면 주민이지만 광장에 나오면 정치학교의 민주 시민이 되는 것, 이런 것이 생활정치이다. 국민운동본부 같은 컨트롤 타워가 중심에서 일사분란하게 지휘할 경우 참여자들은 집회에 동원되는 군중에 불과하지만, 자발적으로 모여 촛불을 들거나 즉석 연설을 청하거나 경청하는 시민들은 생활정치와 시민 교육의 주인공이자 수혜자들이다.
 
자신이 살아가는 일상의 공간이 곧 집회와 시위 현장이 되는 생활정치는 서울 집중식의 집회문화로는 이룰 수 없다. 12일 저녁 서울 집회에서 사회자는 수백 명의 작은 단위로 모여 한창 토론하고 발언하는 시민들에게 난데없이 지방 방송 꺼.”라고 호통을 쳤다. 집회 참여자 모두에게 적용되는 단일한 행사를 진행하는 것도 필요했지만, 그런 식으로 시민들의 자유로운 발언이 오가는 현장에 찬물을 끼얹을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훌륭한 정치 학습의 장에 끼어듦을 미안해야 할 일이었다. 사회자의 입에서 지방 방송이라는 표현이 나오듯 수평을 수직으로 덮어보겠다는 발상은 곧 지역을 무시하는 오만과 권위 의식에 다르지 않다.
 
민주주의 광장으로 변모한 도로를 마음껏 활보하는 해방감, 얼굴도 모르고 살았던 한 동네 지역민들이 자신과 똑같은 분노와 열망을 갖고 있는 이웃임을 확인하는 생활 정치는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에서 맹아가 싹텄다. 촛불 정국을 용케 피한 이명박 정부를 그대로 물려받은 박근혜 정권이 촛불의 위력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전대 미문의 민주주의 파괴를 저지르는 동안, 시민들은 자신의 지역적 공간에서 정치가 쉽고 재미있으며 자신이 세상을 바꾸는 주체임을 깨달아가고 있다. 촛불에 실린 박근혜 하야의 염원이 설령 난관을 만나더라도 지역에 기반을 둔 풀뿌리민주주의의 발전을 이뤄낸 점은 그 어떤 것보다 값진 열매가 될 것이다.
 
 

* <대자보> 편집위원, 문학평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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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16/11/23 [19:59]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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