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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흑 뚫는 창끝이 되어 마침내 새벽 맞으리”
[최방식의 광화문연가] 버마 혁명시인 마웅 소 쉐이와 함께한 서울투어
 
최방식
슬프고 즐거운 날이라면 어쩔지 모르겠습니다. 덥고 시원한 하루였다면 어떨까요. 기쁜데도 아픈 까닭입니다. 독일의 한 실존철학자가 말했던 존재이해를 들먹여봤습니다. 참 묘한 날이었으니까요. 조국에 버림받고 이역만리 타향에서 ‘아픔’을 시로 토해내는 한 버마 시인이야기랍니다. 기자는 노 시인 덕에 생전 처음으로 서울 ‘시티투어’ 호사(?)를 누렸고요.

마웅 소 쉐이는 현재 미국에 살고 있는 버마 시인입니다. 올해로 쉰아홉이니 ‘해방둥이’라 해야겠군요. 48년 버마가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했고, 시인은 이듬해 태어났으니까요. 미국에서 온 그를 부러워할 이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리 탐낼 일은 아닙니다. 조국의 버림을 받았으니까요. 더 정확히 말하자면, 독재정권을 등진 난민이니까요.

비운(?)의 혁명 시인을 마주한 곳은 한국작가회의 회의실입니다. 군사독재에 항거해 수백만명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민주주의’와 ‘자유’를 외쳤던 버마의 ‘8888민중항쟁’. 3천여 주검을 마주하고도 통곡조차 못한 그날, 20주년을 기념해 ‘버마를 사랑하는 작가모임’이 ‘시낭송회’(8일 오후 6시 5호선 마포역 4번출구, 이원문화원)를 열려고 그를 초청한 것이었습니다.
 
▲ '버마를 사랑하는 작가모임'이 '8888민중항쟁' 20주년을 기념해 버마 혁명시인 마웅 소 쉐이를 초청해 8일 시낭송회를 갖습니다. 6일 기자회견에 참석한 관계자들. 가운데 손가락을 쳐든 이가 마웅 소 쉐이.     © 최방식

▲ 기자회견 장면. 마웅 소 쉐이 시인이 민중항쟁 당시를 회상하며 투쟁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 최방식
처음 본 시인의 얼굴에선 아픔이 묻어납니다. 낯섦도 어색함도 잠시. 다부진 투쟁의지... 소외와 적막을 깨는 조금은 과장된 표현은 친밀감입니다. ‘탄환의 의미’ 등 무장투쟁 경험을 담은 시 이야기를 할 땐 방아쇠를 당기는 몸짓까지 재연합니다. 그해 여름, 양곤 하늘을 가른 총소리를 들려주고팠나 봅니다.
 
‘8888민중항쟁’ 되새긴 ‘동행’
 
시인은 버마의 수도인 양곤 교외에서 태어났습니다. 양곤대에서 공부한 그는 73년 처녀작 ‘예술이란 무엇인가’로 시인에 등단합니다. 70년대 중반엔 반독재 학생·노동운동을 벌였고 대학 강사로 ‘8888민중항쟁’에 참여했죠. ‘피의 학살’에 분노한 그는 정글로 숨어들어 총을 잡았습니다. 94년 미국으로 망명하기까지 버마와 태국 국경지역에서 무장투쟁을 벌였고요.

낮엔 총을 쏘고 밤이면 머릿속 또는 메모지의 편린들을 모아 시를 완성했다고 증언했습니다. 91년 발표한 ‘탄환의 의미’(1991년)가 대표적이죠. ‘아름다운 총소리’(1998년), ‘거친 화산’(1999년), ‘여름 지키기와 그 아름다움’(1999년) 등 이 후 타향살이를 하며 내놓은 시집들도 당시 투쟁 경험과 아픔을 노래한 것입니다.

‘어둠을 깨는 꽃들의 황홀한 용기’를 한 번 음미해볼까요. “칠흑 같은 구름에 가려/ 달빛조차 없이 깜깜한.../ 바로 그날 밤... /폭우 속 천둥번개 같은/ 사나운 발톱으로 할퀴면.../ 찔리고 부어올라.../ 고통스런 신음소리/ 천둥소리에 섞여났던/ 그날 밤에... /암흑을 뚫고/ 하얀 꽃잎의 자스민이/ 가느다란 줄기에서 피어나면... / 그토록 부드러운 향은/ 강인한 칼날이 되어.../ 날카로운 창끝이 되어... / 거칠고 험한 암흑을 뚫고/ 음험한 밤의 가면을 찢으며.../ 새벽은 밝아오고/ 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인가!”

▲ 남산타워 주변 난간을 가득메운 약속의 자물쇠통. 연인들이 사랑을 약속하며 이렇게 매단다고...  조금 '뻘쭘'했던 우리 일행은 버마 민주주의의 그날까지 함께 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 최방식

▲ 서울타워에 오르니 서울 북쪽 풍광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잿빛 스모그로 뿌연 하늘입니다.     © 최방식
▲ 서울 도심 어딘가에 지금은 사라져버린 숭례문 앞 풍광을 찍은 사진을 세워놓고 그 앞에 의자를 만들어놨습니다. 일행은 촌스럽게 찍어보자고 다짐하고는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 최방식
새벽을 기다리는 시인의 절규, 새벽을 열어 제치겠다고 방아쇠에 검지를 끼운 채 하얗게 보냈을 수많은 밤이 펼쳐집니다. 그리곤 버마시인과 동행이 시작됐습니다. 한국에 첫걸음을 한 그에게 서울의 이모저모를 보여주겠다는 주최측의 취지였습니다. 작가모임의 임동확 회장과 기자, 그리고 한국에 와 있는 망명시인 조모루인이 함께 나섰습니다.
 
새벽을 기다리는 시인의 절규
 
얄팍한 생각이었을 겁니다. 손쉽게 ‘서울 시티투어’를 선택했으니까요. 투어버스를 수없이 봤는데 어디서 출발하는 지 아는 이는 없습니다. 일부러 시청 앞까지 가 두리번거려도 광장을 삥 둘러싼 전경뿐 보이는 게 없습니다. 시청사 공무원에게 물으니 길 건너 동화면세점 앞이랍니다. 2시간여 때 아닌 ‘호사’가 시작됐습니다.

한데, 시티투어는 부시 미대통령의 방한으로 엉망이 돼 버렸습니다. 그가 용산 미군기지에 머문다는 이유로 전쟁기념관은 아예 폐쇄해버렸습니다. 용산과 남산 인근은 전경들과 버스로 꽉 들어찼고요. 관광객 중에서 ‘조지 좀 빨리 나가라 그래’, ‘누가 불렀어?’라는 불만이 터져 나옵니다.

1시간여 꽉 막힌 남산 주변을 돌던 버스가 서울타워 아래 멈춰섭니다. 우린 더 이상 못 참고 내렸습니다. 낯선 이방인에게 서울을 한 눈에 가장 잘 보여줄 곳이라 여기면서요. 남산에 승용차 통행을 제한한 건 참 잘한 행정입니다. 도심 한 가운데 산인데도 공기가 사뭇 다릅니다.

▲ 인사동 거리에서 만난 꼬마 인기자들. 깡통로봇을 한 번 보더니 금새 제 몸으로 흉내를 내봅니다.     © 최방식

▲ 쌈짓길 어딘가에서 마주한 설치작품. 둥근 세상을 네모에 투영하고팠을까요? 쪽빛 하늘과 제법 어울려 시선을 끌었습니다.     © 최방식

혁명 시인은 이제 탐험가입니다. 사진을 찍고 궁금한 걸 물어댑니다. 기억조차 사라져버린 전망대에 올랐습니다. 고속엘리베이터에서 좀 어지러웠던 듯한데, 벌써 서울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아슬아슬한 곳입니다.

그제야 기억이 되살아옵니다. 꽤 맑은 날씬데도 사방으로 펼쳐진 잿빛 하늘이 동공을 하나 가득 메웁니다. 그 사이로 뻗친 한줄기 햇볕에 제법 눈이 시립니다. 이어 찾은 곳은 해발 4백여미터 고공 화장실. 곁에 선 임동확 회장이 그랬습니다. “서울놈들 내 오줌이나 받아라.”
 
“서울놈들 내 오줌이나 받아라”
 
전망대 유리창엔 지구촌 나라와 도시 이름이 빼곡히 쓰여 있습니다. 비운의 버마인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려고 ‘미얀마’, ‘양곤’(랭군)을 찾았지만 눈에 띄지 않습니다. 괜히 미안한 마음까지 생깁니다. 시인 조모루인이 한마디 던진 게 위안이 됐습니다. “민주정부가 들어서면 새겨줄 겁니다.”

투어버스 정류장이 고요합니다. 아직 버스가 오려면 멀었나봅니다. 오랜만에 ‘아이스바’를 하나 물었습니다. 더위에 지쳐서요. 시간 죽이기도 필요했지요. 혁명 시인도 옛 생각이 나는 모양입니다. 버마에도 옛날 옛적 팟이 든 ‘아이스바’가 있었다며 한 입 베어 뭅니다.

▲ 설치 거울 앞에선 연인. 마웅 소 쉐이 시인도 끼어달라고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기자는 그저 불빛으로만 비쳤습니다.     © 최방식

▲ 인사동 쌈짓길 어디엔가 난간에 매달려있는 쟁반. 그림과 낙서들이 매밌습니다. "밥 먹으러 가자."     © 최방식
▲ 이번에는 조모루인 시인이 동심에 젖었습니다. 누군가 "에이 유치해"하고 지나갔는데 개의치 않고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시인이 연기자가 됐습니다.     © 최방식

다시 시작된 투어버스. 신라호텔, 동대문시장, 대학로, 인사동, 청와대, 경복궁을 거칩니다. 대학로까진 길이 막히는 데다 오르내리는 이도 없습니다. 청와대, 경복궁은 그 잘난 조지 부시 때문에 못 간답니다. 한 사람당 1만원씩이나 내고 왜 이런 형편없는 투어관광을 나섰는지 자책해보지만 때 늦은 후회입니다.

인사동에서 그냥 내리고 말았습니다. 이승철 ‘한국문학평화포럼’ 사무총장이 저녁을 사기로 했으니 차라리 인사동 구경이나 하는 게 더 좋을 성 싶어서였습니다. 쌈짓길을 이곳저곳 뒤졌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상업과 예술이 섞인 곳인데도 볼거리는 넘쳐납니다.

혁명시인 눈엔 한국 전통 수공예품들이 모두가 신기한 모양입니다. 수백만원대의 고가 은제 그릇을 보고는 한 참이나 머물러 이리저리 뜯어봅니다. 뒤편에 있는 경인미술관에 들렀습니다. 단아한 한옥과 정갈한 정원이 보고 싶어서요.
 
시인의 한마디, “나 이제 인간됐네”
 
갤러리가 대여섯 개 되는 모양인데, 수준도 천차만별입니다. 한 전시장에선 음식도 얻어먹었습니다. 장삿속은 여기서도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좀 쉬려고 마당 한 귀퉁이 의자에 앉았더니 남자 한명이 메뉴판을 들고 나타납니다.

▲ 친구들이 이렇게 족적을 남겼군요. 인사동 어딘가 벽에 말입니다. 변치말자고요. 비호감투로 한마디 할까요. "너희들 셋 여긴 괜찮지만 인수봉이나 백운대 바위에는 그리지 마라."     © 최방식

▲ 도심 어딘가에서 찾은 허점. 아무리 녹색으로 치장을 해도 저 기계의 힘을 빌지 않고서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는 게 이곳 도시의 허점입니다. 꼴불견이지만 소중한 존재이기도 하지요.     © 최방식

해가 인왕산 넘어 사라지나 싶더니 찜통더위도 조금 뒷걸음질을 칩니다. 약속된 음식점에 가니 맛 좋은 김치찌개와 반찬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시원한 맥주를 곁들인 저녁이 감칠맛 납니다. 혁명 시인도 어느새 어색함을 털어냈습니다. 형님 아우가 다 돼 저녁 한 때를 즐깁니다.

자리를 한 번 더 옮겼습니다. 인사동 어느 주점에 들러 파전에 동동주 몇 잔씩을 마셨을 겁니다. 술을 못하는 버마 시인도 한 잔쯤은 들이킨 모양입니다. 누군가, “한국에선 술을 못 마시면 인간도 아니다”고 귀띔했던 모양입니다. 한 모금 들이키곤 얼굴을 찌푸리며 “나 이제 인간됐네” 그럽니다.

술이 좀 과한 들 어떻고, 못 마신들 어떠리까. 한국의 민주화투쟁을 기억하고, 한국인과 친구하겠다고 이역만리 길을 마다않고 달려온 버마시인이 반갑고 좋은데. 낯선 부름을 거절치 않은 그도 이젠 우리 일행의 형님이 됐습니다. 버마에 민주주의와 자유가 깃드는 그날까지 ‘존재사유’를, 그리고 ‘진정한 예술’로서 ‘시’를 사랑하기로 맹세한 겁니다.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 평화를 사랑하는 최방식 기자의 길거리통신. 광장에서 쏘는 현장 보도. 그리고 가슴 따뜻한 시선과 글... <인터넷저널> (www.injournal.net) 편집국장입니다
 
기사입력: 2008/08/08 [08:15]  최종편집: ⓒ 대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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