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들어 냉전의 종언과 함께 “이데올로기의 종언”이라는 구호는 온 세계 그리고 우리 나라에도 울려퍼졌다. 그 뒤에 찾아온 것은 “상식”의 시대였다. 자본과 군대를 앞세워 전 지구를 재구조화하기 시작한 전 세계의 지배 계층들도 자신들의 행동의 타당성을 “상식”에의 호소라고 우겨댔다. 100년을 내려오며 화석화되어버린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체계에 은근히 혹은 노골적으로 기대어 그 “과학성”과 정당성을 뽐내다가 소련의 몰락으로 하루 아침에 초상집 강아지 모습이 된 어제의 좌파 세력들도 자신들의 주장의 근거를 슬그머니 “상식”에의 호소로 바꾸기 시작하였다. 90년대 중반 이후 우리 사회에서 형성되어 온 소위 “쿨(cool)한 진보 담론”도 여기에서 예외가 아니다. 확실히 종교적인 신념 체계로 사람들의 머리를 “정리”시켜 판에 박힌 이론과 실천의 틀에 동원하기 위한 “정치 신학”으로서의 좌파 이념은 끝장이 났고 또 이는 슬퍼할 일도 아니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이 과연 “상식”으로 대처할 수 있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90년대 이후 온 세계와 우리 나라를 휘젓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재구조화는 결코 알량한 상식이나 직관 따위로 이해하고 비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업, 금융, 노동과 같은 경제적 분야는 물론 환경, 보건, 연금, 교육과 같은 사회적 분야를 거쳐 통일, 안보 등의 국제적 문제 뿐 아니라 개인의 인생관과 미적 감각까지 지금 세계 자본주의는 전면적인 재편을 행하고 있다. 여기에는 분명한 메카니즘이 있고, 그것을 이념이 아닌 “글로벌 스탠다드”로 치장하는 사상이 있고, 그것을 실행하는 지배 세력의 구체적인 정치적 행동 계획이 있다. 이 톱니처럼 맞물려 있는 지배 세력의 총체적인 담론은 그 애매모호한 “상식” 따위로 덤벼들어봐야 이빨 자국조차 남지 않을만큼 견고하고 복잡한 논리를 가지고 있다. 이를 해체하고 대응하기 위해서는 그 메카니즘을 분석할 수 있는 과학적 정치경제학과 사회 이론, 우리의 진보적 가치를 수미일관한 철학으로 내걸 수 있도록 해줄 사상, 그리고 그에 근거하여 사람들 모두가 능동적인 주체로 일어설 수 있도록 할 구체적 행동 계획과 정책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실사구시의 연구와 구체적 현안을 놓고 오가는 알맹이 있는 토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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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FTA의 문제를 지구정치경학학적으로 풀어놓은 홍기빈의 투자자-국가 집접소송제 ©녹색평론, 2006 | 이는 물론 온갖 지루한 데이터와 자료와 끝없는 토론을 뚫고 나가야 하는 땀투성이 작업이다. “진보 담론”에서 유행하는 책 몇 권만 읽으면 맘에 안드는 세상사에 대해 끝없는 비판의 언설을 쏟아낼 수 있는 “쿨”함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저 정교한 신자유주의의 현실 구조와 맞붙기 위해서 정작 필요한 것은 그 땀냄새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새로운 현실에 새롭게 맞붙는 고통스런 작업을 비겁하게 회피해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낡아버린 예전의 좌파 이론으로 도망가든가 아니면 누구도 시비걸 수 없는 물에 물탄 술에 술탄 “상식적 진보 담론”으로 도망가지 않았던가? 그래서 사람들은 진보 세력이라고 하면 출구도 나오지 않는 구닥다리 비판을 아직도 풀어놓는 이들이든가 그저 좋은 이야기나 풀어놓으면서 정작 사람들의 고통의 중핵을 이루는 사회 경제적 현실에 대해서는 침묵해버리는 “패셔너블한” 지식 분자이든가로 심드렁하게 여기게 되지 않았던가? 정밀한 사회 이론과 인간의 정신을 깊게 울릴 수 있는 사상과 많은 이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수 있는 행동 계획을 갖춘 진보 사상의 재건은 지금 시작되어야 한다. 죽어버린 옛 이론으로든 공허한 상식으로든 도망갈 필요가 없다. 2차 대전 당시 그리스의 혁명가였던 스티나스(Stinas)는 파시스트들과 싸우는 한편 똑같이 폭압적이었던 공산주의 세력과의 투쟁을 멈추지 않고 대담하게 진보 운동의 새로운 출구를 열어나가고자 했다. “혁명가의 생각과 행동에는 그 어떠한 터부도 없다”. 지금 그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 본문은 민주노동당 기관지 [진보정치 330호]에도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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