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의 교류에는 크게 물질적 문화의 교류와 정신적 문화의 교류가 있다. 그 어떠한 물질적 문화가 우리의 생활 속 곳곳에 침투해 있다고 해도 우리의 영혼과 정신세계를 지배할 수는 없다.” 영화배우 이병헌씨가 자신의 홈페이지에 쓴 말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만의 삶과 관습, 문화를 비롯해 우리만의 정신세계, 영혼마저 깃든 정신적 문화의 대표적 산물”인 영화를 오로지 물질적 상품으로 치부해버리는 스크린쿼터 폐지와 그 뒤에 도사린 한-미 자유무역협정의 논리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씨의 이 간명한 주장에는 20세기 후반의 세계 무역 체제의 역사, 그리고 2007년 이후 한국 사회가 겪게 될지도 모를 변화의 성격이 고스란히 압축되어 있다. 폐쇄적 지역 블록으로 찢어졌던 세계 경제는 2차 대전 이후 미국과 영국의 주도로 다시 자유주의적 개방경제 질서로 전환하였다. 케인스나 화이트 등 그 새로운 질서를 입안했던 이들은 다음과 같은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나라와 나라 사이를 오갈 수 있는 것은 자본과 물자 두 가지다. 둘째, 두 가지 모두 자유롭게 이동하면 서로 상대방의 자동 조정 메커니즘을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 셋째, 따라서 자유무역 질서를 유지하려면 국제자본의 이동을 규제해야 한다. 이리하여 전후 세계 경제 질서의 두 축인 ‘관세무역 일반협정’(가트)과 브레턴우즈 체제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결국 가트 체제의 기본 전제는 “나라 사이를 오가는 것은 물자뿐”이며 그 물자들에 관세만 규제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이 생각이 얼마나 오늘날의 현실과 동떨어진 것인지는 분명하다. 국제자본은 규제는커녕 1초에 일곱 바퀴 반의 속도로 전 지구를 속속들이 쓸고 다니고 있다. ‘물자와 물자의 교환’만을 교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돈 되는 데에 직간접으로 관련이 있다면 쿠키 굽는 법, 여배우 벗은 사진, ‘솔루션’, 금융상품, 방송 주파수까지 모두 교역의 대상이 되었다.
상품이란 게 ‘물질’의 모습을 띠고 있어서 돈 밝히는 이를 ‘물질주의자’라고 불렀던 옛날이 아니다. 이제 인간 생활의 거의 대부분을 시장에서 ‘서비스’라는 이름의 상품으로 해결하는 시대인 것이다. 그런데 서비스(service)란 무엇인가. 사실상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필요와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서로 하인(servant)이 되어 주는 관계, 즉 사회적 관계가 아닌가. 1990년대에 새로이 나타난 세계무역기구 체제는 그래서 물질의 모습이건 아니건 ‘서비스’의 거래에 영향을 줄 모든 요소를 제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관세에 대한 규제를 넘어서서 해당국 내부의 정치적·사회적·문화적 관계 전반을 모두 바꾸겠다고 나선 셈이다. 현재 논의되는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그저 쌀 개방이냐 아니냐를 놓고 질질 끌던 옛날의 어수룩한 우루과이라운드 같은 ‘무역’ 협정이 아니다. 의료·교육·매체·농업·금융 등, 이병헌씨 표현대로 대한민국에서의 “삶, 관습, 문화”가 표출되어 있는 각종의 사회적 관계를 모조리 미국식으로 통일시키라고 강제하는 ‘통상’ 협정인 것이다. 지금 추운 거리에 나선 영화인들의 대열은 ‘그들만의 잔치’가 아니다. 의사·교사·은행원·아이티(IT)업자 …, 결국 우리 모두에게 그것도 1년 안에 닥쳐올 문제, 정말 이곳에서의 삶을 모조리 ‘미국식’으로 바꿀 가치가 있는가를 놓고 우리를 일깨우는 소리인 것이다. 자유무역협정으로 얼마나 국내총생산이 늘어날 것인가, 그래서 그것을 가로막는 자들은 얼마나 지독한 집단이기주의자들인가 하고 따지는, 시야가 갇힌 ‘물질주의자’들은 이제 20세기로 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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